엑스트라, 휘말려 들다 (4)
#008. 공포환상기담 : 엑스트라, 휘말려들다 (4)
그렇다. 이 소설의 장르 자체가 덫이었다.
이 소설 속 주인공임에 분명한 저 형사와 원혼과 아이는 자신들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지금 세상이 몇 번째 반복되고 있다는 걸 인식한 것은 틀림이 없다.
도대체 전개가 어떻게 돼먹은 것인지 모르겠고 내가 모르는 저 주인공들의 편에서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내가 자각을 하지 못했더라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갈 조물주의 농간이었으리라.
하지만 루프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보통 루프물,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는 이유는 현재의 상황을 바꾸기 위함이다.
나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로또 당첨 번호를 외워서 1등을 거머쥘 생각부터 하지 않았던가. 아마 이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주인공들 또한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럼없이 과거로 돌아가는 일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과거로 돌아갔는가. 한강에 몸을 던졌을까 아니면 지나가는 차에 치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인터넷으로 이상한 주술을 찾아서 썼거나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기묘한 입구를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나는 소설의 전개를 예상했다.
형사는 살해당한 피해자를 살리고 범인의 단서를 찾고 싶어서 루프를 선택했을 것이고, 피해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어린아이는 아무래도 두 사람을 돕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로 루프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씨X,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저 세 주인공과의 만남이 지긋지긋하게 이어진다 한들, 내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었다. 난 엑스트라였고 이 세계에 영향력은 없다. 몇 번이고 저 주인공들 셋을 만난다 한들, 이상한 반복이 내 일상에서 벌어질 뿐 내 삶은 변하는 게 없어야 할 일이었다.
아마 내가 등장하는 장면을 계속 반복하는 의도에는 조물주란 인간이 소설의 분량을 늘리기 위해 편법을 쓰려는 목적인지도 몰랐다.
에라 모르겠다. 조물주가 뭘 쓰든 소설의 엑스트라인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난 세계에 영향력이 없다. 그저 소설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갈 뿐.
언젠가 이 소설이 결말이 난다면 분명 그때 나는 더 이상 지긋지긋한 세 사람을 볼 일은 없이 모든 걸 잊은 채로 지나가는 평범한 인간 A가 되어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난 다시 결말을 예측해 보았다.
아마 소설의 마지막엔 모든 사건을 해결한 뒤 범인을 잡은 형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모르는 척하는 나에게 오랜만이라며 말을 건네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피해자는 여러 번의 루프 끝에 살아나 어쩌다 지나가는 길에 나와 마주칠지도 모르고. 귀신 보는 꼬마는 원래 착한 녀석이니까 그냥 나한테 인사나 한번 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런 결말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설마 소설의 중반까지 온 걸까?
몇 번을 같은 장면을 반복하다 보니 독자들에게 성화를 들었는지 스스로도 지겨워졌는지 몰라도 이번엔 모르는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여자들이 보기에 환호할 것 같은 말끔한 생김새지만 어딘가 싸늘한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적어도 이 남자는 그동안의 반복된 장면에서 등장한 적은 없던 인간이었다. 난 지금껏 여러 번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나 소설에 영향력이 없는 나는 그런 인지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의 장면을 충분히 완수해야만 했다. 그래서 오늘도 마찬가지로 언젠가 스쳐 갈 세 명의 주인공을 기다렸다. 시간차를 두고 그들이 내 앞에 나타나야만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아니라.
이 남자는 그동안 소설 속에 등장이 없었다.
주인공들은 그 모습을 한번 봤을지언정 소설 속 엑스트라인 나는 전혀 알 수 없던 인간이다. 나와야 할 인간이 나오지 않고 엉뚱한 인간이 나타나 주인공들과 비슷하게 말을 걸자 난 왠지 불길해졌고 그 불길함은 적중했다.
- 이 살인마 새끼…!!
분명 이 살인마 놈도 루프를 선택한 게 분명하다. 주인공 셋이 상황을 바꾸려 계속 과거를 반복한 것처럼 소설 속의 살인마도 그 방법을 알아챈 게 분명하다.
이것은 원래 소설이 가야 할 방향이었던가?
하지만 억울하고 억울하다.
난 그저 주인공들에게 가는 길을 알려줄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인데…. 왜 갑작스럽게 흑막의 희생자로 선택되어야 하는가. 엑스트라는 엑스트라로 남게 해 달란 말이다.
빌어먹을 조물주여!!
아무래도 이놈의 조물주가 맘을 바꿔먹은 모양일까?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에 질려버린 독자들이 화를 내서 이야기를 틀어버린 걸까?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날지도 지금의 나로선 판단할 수 없다. 주인공들은 범인을 잡고 사건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를 반복한다.
살인범은 자기 살인을 즐기기 위해서 다시 과거를 반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반드시 승리한다. 분명 저놈을 쫓는 형사와 유령과 아이가 어떻게든 놈을 잡고 사건을 막을 것이다. 결말쯤에는 분명 범인도 잡히고 사건도 막고 나도 살아나겠지.
이 루프가 언제까지 반복될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결말이 나기 전까지 나에게 찾아온 불행이 길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