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낙원
#010. 공포환상기담 : 하얀 낙원
- 분명 하얗게 빛나는 세상이 있었어.
그는 어두운 그늘 속에 몸을 숨기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시간은 밤이었다. 그에게 있어 밤은 낮보다 움직이기 쉬운 시간이었다. 한동안 먹은 것이 없어 몸에 기운이 없었지만, 여기서 널브러질 수 없었던 그는 애써 자신을 일으켰다.
- 먹을 걸 찾아야 해.
온몸을 지배하는 허기를 달래며 그는 움직였다. 지금 그는 혼자였고 그를 챙겨줄 수 있는 다른 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원래 그에겐 이름이랄 게 없었다. 그건 그를 낳아준 어미도, 그와 함께 태어났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이름보다 중요한 건 생존이었다. 목숨을 부지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름보다 먹이와 안전한 공간이었다. 그는 부모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필요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이름이 없었으므로, 그는 종종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에게도 이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오늘도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피해 그늘에 몸을 숨긴 그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건 아마 자신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보았던 것이리라. 언제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하얗게 빛나던 그 공간은 따뜻하고 식량이 많았다. 자신이 어쩌다가 거기서 나왔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는 가능하면 그 하얀 공간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었다.
그곳이 편안했다는 기억은 아주 선명했으니까.
지금 날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지고 있었고 그는 몸이 굳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날이 대체 언제였을까?
- 이대로는 아이도 못 낳아.
이렇게 주린 상태로 좋은 상대를 만난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일단 배부터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어두운 주변을 살피던 그는 기묘한 소음을 들었다.
위잉-
그건 희한한 울림이었다. 마치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땅이 울리는 소리 같기도 한 그 소음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그는 홀린 것처럼 소음의 진원지를 찾았다.
그 소리를 언제 한번 들어본 적이 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찾았다!
곧 그는 커다란 벽 사이에 미세한 틈을 발견했다. 그 틈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어떤 확신을 가진 채 틈 안으로 움직였다. 그 틈은 다시 높은 계곡으로 이어졌고 그는 새하얀 빛이 거기서 새어 나오는 걸 발견했다.
- 그곳이다!
그는 확신했다. 저 빛이 나오는 공간은 그가 기억하던 하얗게 빛나는 낙원이 틀림없었다. 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바깥과 다른 따뜻하고 훈훈한 공기로 인해 몸이 풀리고 숨통이 트이는 걸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뜻밖의 존재와 맞닥뜨렸다.
“뭐야. 너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거기에는 그 말고도 그와 비슷한 존재가 하나 있었다. 그와 마주친 상대는 조금 산만하게 주변을 맴돌면서 신기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자신과 비슷한 자를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반가웠던 모양일까?
상대는 꽤 호의적으로 말을 늘어놓았고 그도 거부감 없이 그걸 받아들였다. 상대는 쉴 새 없이 그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말을 이어갔다.
“조금만 기다려. 여기는 바깥보다 살기 편하지만 이렇게 밝을 때 먹이를 구하기는 어려워.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테니 그때 나랑 같이 가자고.”
상대는 그보다 먼저 이 땅에 도착한 선배였다. 그는 순순히 말을 들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의 말마따나 환한 빛이 사라지고 사방에 어둠이 깔렸다. 그러자 상대는 그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몸짓을 보였다. 곧이어 그는 상대를 따라 매끈한 땅에 자리 잡을 수 있었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는 힘들이지 않고도 먹이를 구할 수 있는 특별한 땅이라는 걸.
그렇게 매끈한 땅에 다다른 그들이 입을 길게 빼고 목부터 축이려 할 때였다.
화악-
그 순간 갑작스러운 하얀빛이 주변을 덮쳤다. 새하얀 빛은 한순간 그들의 시야를 차단했고 그 움직임마저 더디게 했다.
“도망쳐…!”
곧이어 당황한 상대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휘리릭 기괴한 소리를 내며 어마어마한 폭풍이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파지직-!
이윽고 커다란 바위와 함께 벼락이 떨어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상대의 몸에서 불꽃이 일어났고 그는 상대의 몸이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기겁했다.
적어도 밖에 있을 때는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이들을 보면 봤지, 저렇게 죽는 자들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휘이익-
다시 어마어마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꾸물거리다간 자신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 안돼. 난 살아남아서 자식들을 낳아야 해!
이윽고 육중한 데다 벼락까지 뿜는 바위가 그의 몸 위로 날아왔다. 저 바위가 어떤 원리로 날아오는지 그것이 어떻게 벼락을 내리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저것에 맞으면 즉사할 것이다. 그는 도망치기 위해 온몸의 힘을 끌어냈다.
파악-!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변의 공기가 일렁거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위는 그의 몸을 스쳤고 간발의 차이로 그는 목숨을 건졌다.
그는 판단했다.
이곳은 밝고 따뜻하며 식량이 넘치지만 오래 있을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걸.
- 내가 처음 들어왔던 틈으로 나가자!
그는 충격으로 흔들리는 온몸을 겨우 추스르며 자신이 들어왔던 공간을 찾았다. 밖은 어둠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출구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충격으로 기억이 왜곡된 건지 그 작은 출구를 다시 찾기는 어려웠고 그는 날카롭고 무거운 바람이 자신을 덮치는 걸 알았다.
***
“아악! 개시X! 이 X 같은 모기 새끼!!”
주연은 전기 모기채를 휘두르다가 악악 소리를 질렀다. 안방에서 엄마가 조용히 하라며 잔소리를 하는 게 들렸지만, 주연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주연은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그의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소음이 들리기 전까진.
빌어먹을 모기가 나타난 것이다.
주연은 후다닥 일어나 전기 모기채부터 꺼내 들었다. 부리나케 불을 켜자 그는 두 마리 모기가 앵앵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날아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새끼들이!”
주연은 살의를 숨기지도 않으며 전기 모기채를 휘둘렀다. 이내 타는 소리와 함께 한 놈이 모기채에 맞아 바닥으로 힘없이 추락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주연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분명 날아다니는 모기는 두 마리였기 때문이다.
주연은 나머지 한 놈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렸다.
이윽고 주연은 비실거리면서 창가 주변을 얼쩡거리는 모기를 발견했다. 모기를 본 순간 주연은 망설일 것도 없이 전기 모기채를 휘둘렀다
곧이어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불꽃이 튀면서 모기의 시신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