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집 : 이야기를 모으는 자 -7-

물 위의 공 (1)

by 이사금

#007. 물 위의 공 (1)






그리고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밖에서 문을 잠근 재민이었다.


“형! 그 녀석하고 재미 좀 봐요.”


낄낄거리는 재민의 웃음소리는 명백하게 여래를 비웃는 의도가 실려 있었다. 그러나 형이라 부른 남자를 향해 알랑거리는 말투에는 어딘가 높은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아부의 느낌이 짙게 묻어나왔다.

재민의 그 불쾌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래는 그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정신이 퍼뜩 드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문을 부수고 나가 재민의 얼굴을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재민에 대한 분노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에 대한 공포심을 눌러버렸다.


여래는 마치 눈앞의 존재가 재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그런 여래의 태도에 남자가 조금 흥미를 느낀 건지 그 입술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걸렸다.

“여기에 다시 앉아.”


남자는 나지막하게 여래에게 명령했다. 여래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고 남자의 존재가 거북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비위를 거스르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 일단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자.


남자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상황을 살피고 빠져나갈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그 두려운 와중에도 여래의 머리가 놀라울 정도로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


곧 여래는 남자의 말대로 조용히 테이블 반대편에 앉았다. 아직 추워지려면 몇 개월이나 남아있는데도 겨울처럼 공기가 차가웠다. 그 서늘함에 소스라치면서도 여래는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며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 여기서 밀리면 안 돼.


꼭 동물이 타고난 생존 본능처럼 여래는 직감하고 있었다. 여기서 남자에게 겁을 먹은 것을 티 내거나 먼저 살려달라고 매달리면 끝장이라고. 아마 눈앞의 남자는 그걸 바라고 여래를 붙잡아놓은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며 여래는 자신의 공포심을 억누르려 애썼다. 불안 때문에 심장이 평소보다 배로 뛰고, 등에선 비처럼 땀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 남자 앞에서 두렵다는 기색을 보이기 싫었던 여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을 부릅떴다.

얼굴에 힘이 들어가자 여래의 시야는 좀 더 또렷해졌고, 어둠에 익숙해졌는지 반대편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여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그러나 여래는 이상할 정도로 남자의 얼굴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어둠이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니다. 그저 남자의 생김새가 놀라울 정도로 특색이 없는 탓이다. 여래는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그 얼굴에선 어떤 특출난 개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만약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남자를 지나친다면 분명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여래는 파악했다.

그래도 지금 남자에게서 특이점을 찾아낸다고 한다면 남자가 밖에 있는 유재민보다, 그리고 여래 자신보다 나이가 약간 더 많아 보인다는 점, 그리고 여래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 이상할 정도로 생기가 없어 보인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인형이나 마네킹, 아니 시체의 눈처럼 그 눈은 칙칙하며 감정이 없어 보였다. 사람 같지 않은 그 눈동자에서 여래는 아까보다 더한 섬뜩함을 느꼈다.


다시 한번 얼음과도 같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지배하기 전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해.”

“네?”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여래는 순간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고요?”


두려운 상황에서도 여래가 황당한 듯 질문하자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하라고.”


남자의 뜬금없는 말에 여래는 순간 두려움을 잊고 무슨 소리를 하냐는 의미로 그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어떤 동요도 없이 마치 사물 쳐다보듯 여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이야기를 수집해. 그리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이야기를 만들어.”


그렇게 마치 봇물이라도 터진 것처럼 남자는 말을 잇기 시작했다. 여래는 어안이 벙벙하면서 그의 말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뻔한 이야기는 필요 없어. 난 현실을 초월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이야.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 난 현실 같지 않아도 마치 현실처럼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왜냐면 현실은 지독하게 따분하니까. 그동안 내가 만난 녀석들은 하나같이 멍청하고 따분한 인간들이었어. 사람들이란 건 하나같이 구질구질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리며 바보짓을 할 뿐이야. 난 그런 녀석들의 이야기도 싫고 그런 녀석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도 시시하다고.


난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그 뒤통수를 후려칠 것 같은 이야기를 원해. 내 심장은 따분함으로 굳어버린 지 오래니까. 내 심장을 뛰게 만들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오싹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네가 나한테 들려줬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생생한 이야기. 난 그런 이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거든.”


마치 남자는 여래가 앞에 있다는 것을 잊은 것처럼 자기 생각에 취해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 긴 이야기 사이에서 여래는 남자가 자신을 소설가라고 밝히는 걸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가 무슨 소설을 쓰는지 밝히지 않았다. 곧 여래는 남자의 태도에 어딘가 허세가 섞여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니까 내가 만족할 때까지 이야기를 들려주면 돌려보내 줄게. 맘에 드는 이야기라면 특히 더 빨리 돌려보내 줄 생각도 있어.”


그때 남자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래는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실하게 느꼈다.


- 어떻게 소하한테 연락을 할 수 없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해.

그러나 핸드폰이 든 가방은 어디에 치워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여래는 초조해졌다. 남자는 여래를 압박하듯 빤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 여래는 저도 모르게 적당한 이야기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제발 어떻게든 떠올리자.


아니, 만들어내자.


이 남자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시간을 끌 수 있는 이야기를 이어가자.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자.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래에게는 무척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침묵을 깨고 여래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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