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화살 (3)
#011. 돌아온 화살 (3)
“…….”
이야기가 거기까지 다다르자, 여래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남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다시 아까처럼 서늘한 침묵이 남자와 여래 사이에 깔렸고, 여래는 이야기 중간 다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남자의 감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에서 여래는 미묘한 불만을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오싹한 이야기를 원했는데, 왜 남녀의 청춘 만남 같은 이야기를 꺼내냐 이 말이지?
한 순간이나마 여래는 자신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남자의 불만을 이해했다.
이건 소설이나 드라마를 종종 보던 여래도 가끔 가지게 되는 불만이었으니까. 특정 장르에 특정 분위기를 원하고 보게 된 작품이 정작 엉뚱하고 부수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재미도 없고 흥미도 사라지고 관심도 꺼지기 마련이다.
더 심하게는 창작자를 향해 왜 주제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냐며 불평을 터뜨리는 경우도 적지 않고,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여래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이야기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자신했다.
이야기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고, 서두에는 배경과 떡밥을 잘 깔아놔야 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자에게도 끝까지 완수할 인내심이 필요하듯, 요구하는 자에게도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여래는 그 상황에서 놀랍게도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반응에 당황한 남자가 뭐라고 항의하기도 전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4.
윤슬은 참으로 이상한 여자였다. 강기를 처음 만난 것은 그 계단에서였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강기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윤슬은 강기와 비슷한 또래였고 형편이 좋지 않아 휴학을 여러 번 하면서 최근 겨우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지금은 아르바이트와 봉사활동을 병행한다고 했다.
윤슬은 강기가 걱정이 되었는지 아르바이트나 봉사활동이 끝나면 그를 도와주겠다며 종종 그의 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강기는 윤슬의 그런 친절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는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윤슬에게 강기가 함부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강기가 느끼기엔 윤슬은 자신에게 호감을 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자신한테 친절을 베풀 리 없을 거라며 강기는 상황을 좋게좋게 해석했다.
처음엔 윤슬이 봉사활동을 다닌다고 하니 몸이 불편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강기는 그렇게 생각도 했다.
윤슬이 왜 강기를 특별하게 대하는지 그 저의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강기는 사람의 정이 매우 그리운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윤슬의 태도를 자기 좋을 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강기는 다시 기억을 더듬었다.
- 내가 언제 윤슬을 만난 적이 있었나?
윤슬이란 이름은 무척 특이하고 예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굴은 무척 평범하고 인상조차 흐렸다. 윤슬과 비슷한 얼굴은 세상에 많았다. 그래서 강기는 어쩌면 특이한 이름과 더불어 윤슬을 어딘가에서 봤다고 착각했던 걸지도 몰랐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윤슬의 외모는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고 가끔 사람들이 윤슬을 보면서 그 이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종종 윤슬도 가끔 장난처럼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그러나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강기 역시 객관적으로 그가 예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슬 역시 자신이 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강기는 윤슬이 다른 여자들보다 예쁘다고 느끼게 되었다.
강기는 자신의 심장이 처음 느끼는 감정으로 뛰는 걸 느꼈다. 첫사랑이라는 설레는 감정이 아주 뒤늦게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과 함께 불길한 덫이 그를 찾아들었다.
아니다. 강기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덫이 사랑과 함께 찾아온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 자체가 강기의 인생에서 가장 교묘한 덫이었던 것이다.
얼마 안 가 강기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자신을 에워싼 윤슬의 교묘하고 악의(惡意) 어린 행동을. 그리고 그 악의는 오로지 강기만이 눈치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를 둘러싼 누구도 윤슬이 감히 그러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윤슬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시없을 착한 여자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윤슬이 계단에서 강기에게 보여 준 친절, 그 이후 보낸 호의 때문에 강기 자신도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윤슬이 강기의 핸드폰에 남겨진 추억의 사진을 구경하다가 ‘실수’로 그것들을 전부 삭제해버린 일 같은 건. 그때의 일은 황당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그 핸드폰에는 사고를 당하기 전 지금보다 건강했던 강기의 모습이 고대로 실려있었다. 강기 일생에서 즐거웠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던 사진들이었다. 그렇지만, 안절부절 못 해하는 그를 보자 강기는 그의 행동이 정말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은 복원하기 쉬우니 괜찮다며 오히려 그가 윤슬을 위로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다음의 일도 실수였던 것 같았다. 커피 포트의 물을 엉뚱하게 강기의 몸 위에 쏟는 일 같은 건.
윤슬은 최근에 잠을 잘 못자서 정신이 없었다며 강기에게 미안해했다. 강기는 그때도 괜찮다고 했다. 화상 자국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윤슬이 집을 찾아와 집안일을 거들어 준 게 한두 번은 아니었다. 결국 윤슬이 피로한 데에는 자신이 부담을 준 탓도 있다고 오히려 강기는 스스로를 자책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다음의 일도 윤슬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강기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음식을 ‘잘못’ 사 온다거나 하는 일 같은 건.
그렇게 응급실에 실려 간 강기는 자신이 윤슬에게 미처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밝혔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건 윤슬이 식품 구성표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탓이라고, 그저 실수라고 여기며 다음에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