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집 : 이야기를 모으는 자 -12-

돌아온 화살 (4)

by 이사금

#012. 돌아온 화살 (4)






또한 가끔 걸려오는 동생의 전화에, 정말 간간이 연락하는 어머니의 전화에 강기의 핸드폰을 빼앗아 그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신 통화를 하는 것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 일 이후 강기의 일거수일투족이 오로지 윤슬에게 달린 것처럼 되어버린 듯했지만 그래도 윤슬이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닐 거라며 강기는 그를 이해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몸이 열로 펄펄 끓는데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윤슬의 태도는 진심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전 같았으면 분명 약이라도 사 오겠다며 난리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윤슬은 평소 때와 달리 매우 차가운 눈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윤슬아, 윤슬아…. 나 몸이 안 좋아. 열이 많이 나.”


열기로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강기가 겨우 말을 꺼내자 윤슬은 아무 말 없이 부엌을 향했다. 냉장고 문이 열리고 드르륵 뭔가를 꺼내는 소리가 났다.


강기에게 먹일 죽이라도 만들려는 걸까?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슬이 쟁반에 담긴 그릇을 가지고 왔다. 그 짧은 시간에 뭘 만든 건지 강기가 채 확인도 하기 전에 윤슬이 그릇에 담긴 것을 강기의 얼굴에 그대로 쏟았다.


그건 차갑고 차가운 얼음물이었다.


강기는 당황하여 얼굴 위로 쏟아진 얼음을 손으로 거두고 물기를 닦아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때? 이제 시원하지?!”


그때 지나치게 태연하다 못해 웃음기까지 가득한 윤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기는 확신했다.


이 여자는 절대로 정상이 아니다. 참다못한 강기가 윤슬의 팔목을 휙 낚아챘다. 순간 윤슬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윤슬은 겁먹기는커녕 강기에 얼굴에 끼얹은 얼음보다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놔라.”


강기가 윤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팔목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쫘악- 하는 소리와 함께 윤슬의 다른 쪽 손이 강기의 얼굴로 날아갔다.


순간 강기는 얼굴보다 머릿속이 더 얼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에도 윤슬을 붙든 손은 놓지 않았다. 강기는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처럼 윤슬에게 소리를 쳤다.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강기의 목소리가 방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만약 이웃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남녀가 싸우고 있다고 착각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방 안의 상황은 싸움이 아니었다. 애초에 윤슬의 팔을 강기가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윤슬은 강기에게 밀리지도 겁먹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윤슬의 얼굴이 마치 강기를 가소롭게 내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강기는 처음 보는 윤슬의 그 표정에 목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맛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싸한 겨울 공기와 같은 적막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윤슬이었다.


“어머 너 정말 기억 안 나? 동현중학교 2학년 6반 이강기!”


윤슬의 입에서 뜻밖의 단어가 튀어나오자 강기의 몸이 굳어졌다.


동현중학교라니, 강기는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강기의 과거가 되새김질하듯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소 아귀가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강기는 윤슬이 낯이 익다고 생각했었을까? 그리고 윤슬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던 걸까?


그건 실제로 윤슬과 강기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강기는 그제야 깨달았다.


꼭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강기의 머릿속에서 그동안의 일들이 저절로 맞아 들어갔다.


강기는 차근차근 떠올렸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최고로 찬란했을지 모를 그 어린 시절을. 현재의 강기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하고 제멋대로였던 시절을.


사고가 나기 이전보다 더 난폭하고 경우 없었던 애새끼였던 자신을 말이다. 차라리 사고를 당한 지금의 강기가 더 어른스럽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폭력적이었던 그 시절을 말이다


5.


- X 같은 년아. 까불면 진짜 죽여버린다.


그때 강기가 윤슬을 부를 때 쓰는 말 중에 냄새나는 년이란 욕은 아주 약한 정도에 속했다. 개년, 시X년, 창년, 더러운 거지년이라 부르는 일은 일상이었다. 교사가 보지 않는 데서 윤슬의 작은 체구를 걷어차는 것 또한 일상이었다.


윤슬의 애써 묶은 머리채를 손으로 잡아다 교실 뒤에서 끌고 당기며 개 취급을 하는 것은 예사였다. 그때마다 윤슬의 머리칼은 잔뜩 헝클어져서 엉망이 되었다.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훌쩍거리면서도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그의 다리를 걷어차는 것은 당연한 처벌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반의 아이들 중 일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철없이 웃어댔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강기에게 끌려다니는 윤슬의 모습을 안 됐다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도 강기에게 감히 그만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윤슬을 감싸다가 자신이 윤슬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강기가 윤슬이 쓴 안경테를 부러뜨리고 안경알에 낙서를 하다가 흠집을 내거나 깨뜨리는 것은 아주 약한 장난에 속했다. 그날 윤슬은 안경을 떨어뜨려서 깨진 거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강기 앞에 있는 윤슬은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강기는 윤슬이 렌즈를 쓰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가 된 건지 아니면 강기를 속이기 위해 이미지를 바꾼 건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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