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의 섭리

오십대 종교인과 사십대 불가지론자의 접점

2025년 2월의 겨울밤은 유난히 매서웠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며 나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희미하게 퍼져 있었다. 주택가를 벗어나 한적한 거리로 들어서자, 목적지인 작은 바가 보였다. 문 앞에서 서성이던 한 남자가 나를 보고 천천히 다가왔다.


붉어진 볼과 느릿한 발걸음이 그가 이미 몇 잔을 걸쳤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차 문을 열고 올라탄 그는 “Bonsoir.” 하고 인사를 건넸다. 목적지를 확인한 뒤 나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올해로 쉰이 되었어요.”


그는 맥락없이 말을 꺼냈다. 백미러를 통해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은 묘하게 차분해 보였다. 그는 몇 초간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다가 말을 이었다.


“마흔이 되었을 때는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었죠. 그런데 쉰은… 글쎄요, 그냥 그렇게 흘러가네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시청 공무원으로서의 안정된 직장, 하지만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그리고 다가올 은퇴에 대한 흐릿한 계획과 함께, 늦은 결혼에 늦게 갖은 다섯 살 된 딸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가끔 걱정이 스며든다고 했다.


“사실, 처음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어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딩크족으로 지내고 싶었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거든요.”


그의 말에서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마흔 넘어 결혼해서 이제 늦둥이를 키우는 친구 부모들을 떠올렸다. 그들에게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을 이루는 방식은 달라도, 결국 사랑과 책임이 그 안에 자리하는 것은 똑같았다.


“결국, 신의 뜻대로 되겠죠.” 그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나는 신을 믿어요. 신은 나보다 더 넓은 시야로 모든 걸 보고 계실 테니까요.”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까지 신의 존재를 가까이 두었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신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그런 내게 그의 말은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신념 속에서 안정을 찾는 모습이 조금은 부러웠다.


그의 말에 나는 한국의 50대를 떠올렸다. 한국에서도 50대는 비슷한 고민을 한다. 자녀의 교육, 경제적 부담, 건강에 대한 생각들. 시대와 환경이 달라도 인간이 품는 근심은 닮아 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스트라스부르의 교외 밤거리는 고요했고, 따뜻한 불빛이 창문 너머로 번져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가 자라는 걸 보면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긴 인생 속에서 걱정은 끊이지 않지만,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살아가고, 때로는 신에게 기대며 희망을 찾는다. 나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가 말하는 신의 섭리가 곧 우리가 만들어가는 삶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착지에 다다랐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차창 너머로 스치는 불빛들이 마치 조용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인생이란 결국 같은 길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각자가 타고 가는 차가 다를 뿐.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경계인의 출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