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번영과 함께 세운 성과 하벨리
18. 자이살메르성, 하벨리 그리고 부띠끄한 골목들
자이살메르까지 걸어가는 골목길은 나를 더 골든시티에 대한 환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온통 황토색의 건물로 지은 집들이었다. 방향을 어느정도 예측하면서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굳이 방향을 알필요가 없었다. 저기 높게 보이는 자이살메르성을 따라 길을 따라갔다니 자이살메르의 외벽에 다다랗다. 9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라자스탄에 남아 있는 성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앞에 있었다. 900년 전에도 이런 성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유럽-중동-페르시아와 인도 본토를 연결하는 사막 교역로의 핵심 기지로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번영을 누렸다. 자이살메르의 번영은 중개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았던 무역상 등이 건설한 하벨리들을 세웠고, 대표적인 하벨리가 바로 파트완 키 하벨리, 나뜨말지 키 하벨리, 살림 싱 키 하벨리 등이 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뭄바이항의 건설로 주요 운송수단이 육로에서 해운으로 바뀌는 것과 함께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가 자이살메르는 인도 서쪽의 고립된 도시로 되었고 많은 육로로 옮기던 물자들의 왕래도 크게 줄었다. 그나마 이제 남은건 나와 같은 낙타사파리의 낭만을 갖은 자들이 이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자이살메르 성을 보면서 느껴지는 위압감과 경건함은 메헤랑가르성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겼다. 다만 자이살메르성과 다른점은 900년전에도 그랬듯이 성위에서 사람이살고 있다는 것이다. 메헤랑가르성은 대부분을 박물관과 관광명소로 개조한것과 달리, 자이살메르성은 일반 상점과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면 성위에서 숙박까지 가능할 수 있다는것이다. 마치 900년전의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즉, 용인민속촌을 메헤랑가르성이라고 한다면, 제주 민속마을은 자이살메르성이라고 비교 할 수 있겠다. 느껴지는원초적인 성의 느낌은 자이살메르성이 더 깊이가 있었다.
태양과 어울려져서 일부는 그늘에 가려지고 일부는 태양에 빛에 반사하여 황금색을 더욱 발하였을 때 공기와 태양의 빛 그리고 성이 한데 어울려져서 굉장히 아름다운 경의감을 만들어냈다. 추가적으로 한두 마리씩 파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검은 까마귀들... 고개를 계속해서 위로 젖힌채 자이살메르성의 아름다운에 시선을 빼앗긴채 올라갔다. 올라가는 중간중간에도 조드푸르의 메헤랑가르성을 공부하고 와서 인지 비슷한 구조물, 특히 문이 작고 좁은길에 있는 것 등을 이해하는데는 가이드가 없어도 어렵지 않았다.
자이살메르 상단부에 올라섰다고 느껴졌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마하라자의 궁전이었다.
총 7층, 창틀 기준으로 본다면 5층의 높이를 자랑하는 자이살메르 마하라왈의 궁전, 참고로 마하라왈이란 마하라자보다 낮은 등급의 왕을 일컫는말. 마하라나>마하라자>마하라왈의 순서라고 보면 된다. 때문에 궁전의 내부도 지금까지 봐온 조드뿌르나 우다이뿌르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 정문을 통해 들어간 중정 이 공식 접견실인 디와니암의 역할을 겸하고 있을 정도다.
현재까지도 마하라왈의 후예가 살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으로 개조한 일부 구역만 일반에게 공개된다. 왕국의 규모가 작은 만큼, 소장품 또한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다. 자타 공인 자이살메르궁의 핵심으로 쏜꼽는 랑마할의 거울 장식 정도만 신경써서 보면 된다.
전명윤,김영남,주종원,[프렌즈 인도.네팔 '14~'15 개정판], 중앙books(2014), P.516
왕의 권위에 따라 성의 크기도 그에 따라 비례하는법이 아닐까? 고인돌의 크기는 묻혀 있는 리더의 권위에 따라 돌의 크기가 다른거 처럼 왕의 권위 처럼 자이살메르의 성은 작은 규모를 보이고 있지만 그만큼 왕과 그리고 그 성을 살던 사람들은 친분한 상태를 유지한 거 처럼 보인다. 마하라왈이 궁전에서 내려오게 되면 상인들과 마주하게 되고, 마하라자의궁전 앞에서 서민들과 이야기를 직접들으며 자이살메르의 부국에 대한 논의와 미래에 대해서 왕과 성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고민하고 소통하기에는이 조그만한 성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성을 더 크게 지어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어울려 지냄의 덕을 알고 미를 아는 왕이야 말로 실크로드의 무역에서 부유한 도시를 이끌 수 있었던 자격이 있었지 않았을까?
인도의 다른 성과 다르게 웅장하지 않고 조밀조밀 모여 있는 건물이 만들어 내는 골목들은 아라바안나이트를 방불케 했으며, 아라비안나이트의 주인공이 되어 나의 소원을 들어줄 램프와 날으는 양탄자를 찾아 골목골목을 다녔다. 작은 골목에서도 손수레와 오토바이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가고 황금색의 직사각형의 집들과 3층이상의 건물들은 세밀한조각과 1인용 테라스들이 즐비해 있는 광경은 900년전으로 돌아간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은 골목의 방해를 받아 각 건물들의 모두 담지 못하였으나, 이 또한 사진으로 남기는 나의 작업을 자이살메르에서 하기 보다는 마음속으로 이 작은 건물들의 묘미를 가슴속에 담아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굳이 마하라자의 궁전과 자인교 사원군은 들어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마하라왈의 후예가 살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으로 개조한 일부 구역만 공개하였고, 규모가 작아 소장품 또한 그리 특색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니, 굳이 450루피 우리나라돈 9000원을 소비하면서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다른 하벨리들을 돌면서 내부를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또한, 이 작은 성안에도 자인교 사원군, 그냥 사원이 아닌 사원군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각 사원들이 모여 있기 때문인데 각 사원들은 좁은 계단으로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분하기도 어렵다고 하니, 자인교앞에서 발길을돌려 자이살메르성의 꼭지점 마다 있는 전망대를 갔다.
자이살메르성은 삼각형의 큰 구조를 이루고 있었고 북측과 동측, 그리고 서측의 전망대를 두어 골든 시티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자이살메르의 황금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이런 전망들은 나에게 큰 한숨을 내뿜을 수 있는 시원함을 가져다 주었다.
성을 내려와 성뿐만 아니라 자이살메르의 성의 골목뿐만 아니라 자이살메르 왕국의 골목까지 마음의 사진기로 찍기위해 발을 굴렀고, 돈이 많은 상인들의 집이었다던 하벨리를 가기위해 걸어서 감상하기로했다. 살람 싱키 하벨리 -> 파트완 키 하벨리 -> 나뜨말지 키 하벨리 순으로 가기 위해 목표를 정했고, 성을 내려온 자이살메르 시내의 골목도 자이살메르 성위에 처럼 좁은 골목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들의 테라스가 가까운 것은 자이살메르성 안에 있는 골목들과 유사해 보였다.
가장 가까운 살람 싱 키 하벨리에 먼저 도착하였다. 여긴 특별한 관리를 하거나 그런 모습이 아닌 무너져 있으면 무너져 있고, 닳아있으면 닳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지고 있다. 단지 주목할 것은900년 가까이 이전에 고층 건물을 지었다는 것인데, 그것 말고는 오싹한 내부 풍경에 당시 삶이 그렇게까지 유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 살림 싱 키 하벨리의 상단 부분은 자이살메르 성 위에 있는 마하라왈 궁전과 비슷하게 생겼다. 돈이 생기면 권력을 취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듯, 이 하벨리를 지은 살림 싱 키라는 사람은 그러한 욕구를 자기가 벌은 부로써 표출 하고 싶었던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또 다시, 자이살메르의 앤티크한 골목을 지나 파트완 키 하벨리에 도착했다. 자이살메르 성에 있는 궁전보다 클 정도로 굉장히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중개업으로 돈을 번 자인교 신자 5형제가 지었다고 한다. 사진과 같이 4층 건물 ‘ㄷ’자 모양의 건물이 모두 하트완 키 하벨리라는 것! 돈을 정말 얼마나 번것일까?
파트완 키 하벨리를 사진 한컷으로 닮는 것은 불가능했다.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면서 나 또한 렌즈의 담으려고 했지만 공간은 좁은 것에 반해 건물은 굉장히 크고 넓었다.
살람 싱 키하벨리와도 다르게 관리와 보존이 잘되있는 내부 모습에도 볼것이 굉장히 많았다. 다만 900년전의 시대상을 모두 반영된 것이 아닌, 900년 동안 계속해서 후손들도 문물을 받아들이고 수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축음기가 있다. 축음기는 발명의 왕 에디슨이 1877년에 발명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900년 전에 만들어져 왕래 되어 이곳에 왔다고 한다면 축음기는 에디슨이 아닌 다른 유럽이나 아시아의 누군가가 발명한 것이 되지 않을까? 이런 축음기는 쌓아놓은 부로 인해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 뿐만 아니라 선풍기로 보여지는 물건까지, 현대시대가아닌 오랜 옛날에 왕래가 됐을꺼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쇼파도 있어? 여긴 박물관의 수준을 넘어서고 동서양의 잦은 왕래의 결과가 과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느낄 수 가 있었다. 육로로 이동하는 길에 자이살메르는 핵심 거점이었고, 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한 상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상품들이나 물건들을 조금씩 팔면서 여비를 마련했을 것이다. 그랬을 시 발생하는 동양과 서양의 물건들은 다 거래가 됐을 것이고 그 중, 부자들은 진기하고 편리한 물건을 사들였을것이다. 그 사들인 물건들의 전시를 보니 단순히 인도의 특색있는 과거의 유물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문화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파트완 키 하벨리라는 부자들의 저택에서 볼 수 있었고,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실크로드의 현장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다.
안에는 심지어 아까보고온 살람싱 키 하벨리와 다르게 유복한 생활과 은으로 된 화장대와 탁자 그리고 벽화들이 내눈을 부시게했다. 인도의 색이 아닌 유럽풍의 탁자와 쇼파가 시선을 끄는 방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유럽의 방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자이살메르의 특색이 아닌 상품의 왕래로 새로운 멋으로 방을 인테리어 한 곳도 있었다.
발코니와 문의 새겨진 무늬까지 빛줄기와 어울어져 고급과 허세를 뽐내었으며, 발코니를 통해 자이살메르의 골목을 바라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조드푸르의 사다르 바자르에 있던 시계탑 모형이 여기 있다. 이건 언제 만들어진 건지 확인이 불가능 했지만 이런 모형까지 소유했던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뿐이었다.
조드푸르의 메헤랑 가르성에 있던 투박한 건물 안에 있던 것 처럼 여기 하벨리도 광장을 만들어내고 채광을 받기 위한 구조물을 만들어 냈다. 이 하벨리를 위해서 자이살메르의 성, 메헤랑 가르성 등 많은 주변의 건축물들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님 여기의 건축이 다른 메헤랑가르성의 영향을 준것일까? 정보가 없어 아쉬움을 느낄 수 없었지만 그 정도로 여긴 건축가 그리고 주인에 의해서 많은 시도와 욕심을 부린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하벨리들의 모든 특정은 옥상에서 이렇게 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하벨리가 아닌 다른 건물의 옥상에서도 자이살메르성이 보일 테지만, 특이나 하벨리에서 특별하게 성이 보이는 의미는 우국충절(?) 이려나? 자신이 갖고 있는 부나 명예가 높다 한들 성과 도시를 통치하는 왕의 덕에 비하면 낮은 인물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