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필드만 조명하지만 그 이면에 조명받지 못한 벤치 멤버들이 없다면
대한민국 남성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학창 시절 혹은 군대에서 축구를 했던 추억이 하나쯤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축구를 좋아하는 스타일을 아니었지만 함께 뭉쳐 노는 시간에 어울리는 정도로 참여했다가 언제부터인가 ‘나도 명확한 포지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직후부터 눈에 들어온 자리가 골키퍼였고 그때부터 축구를 할 때면 골키퍼 자리를 좋아했었습니다. 당시 학창 시절 골키퍼는 공격수보다 크게 주목 받지 않는 자리였고 개인적으로 오펜스보단 디펜스가 체질에 맞았고 간혹 선방 후 하프라인 넘어서까지 멋있게 뻥뻥 차주면 주목도 받고 자존감도 높아지는 느낌에 좋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저의 업(業)도 골키퍼와 같은 일의 연장선이니 사람의 본성은 역시 변하지 않나 봅니다.
소싯적, 정답 같은 격언이나 명언도 반대로 보는 청개구리 같은 습관도 있었는데 이런 식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먼저 잡아먹는다"라는 말도 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먼저 잡아먹힐 수 있다"라고 입장을 바꿔보거나 “골키퍼가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라며 임자 있는 이성에 대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당시 연예 격언도 저에게는 “골 들어간다고 골키퍼는 거의 안 바뀐다”라고 좀 더 현실적인 상황으로 관점을 바꾸는 식이었습니다.
국가대표 골키퍼 하면 생각하는 여러 선수들 중 조병득 골키퍼 이야기까지 하면 고인 물로 인식되는 연식이 나와서 쑥스럽지만 국가대표 골키퍼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가장 먼저 이끈 선수는 대부분 알고 있는 김병지 선수입니다. 그런데 골키퍼라는 자리는 위에서 우스갯소리로 말씀드렸지만 특히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선발 주전으로 선택되면 큰 부상을 입지 않는 한 웬만하면 바뀌지 않습니다. 정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월드컵 멤버로 선발되었지만 감독의 부름을 받지 않으면 벤치 멤버로 월드컵에 참여해서 그대로 월드컵이 끝나는 경우들은 허다합니다. 더 잔인한 것은 이전 월드컵에서 벤치 멤버였다가 이번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뛰면 다음 월드컵에선 다시 벤치 멤버가 되었다가 국가대표를 마감하는 패턴들이 하나의 공식처럼 작용되는 포지션이기도 합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선발 주전이었던 김병지 선수는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본선에서 이운재 선수에게 선발 주전 자리를 내준 후 벤치 멤버로 내려갔고 이후 이운재 선수는 2002년 한국/일본 월드컵 본선, 2006년 독일월 드컵 본선까지 선발 선수였다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선 정성룡 선수에게 선발 자리를 내주고 벤치 멤버로 월드컵을 치릅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 선발 주전이었던 정성룡 선수는 다음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때 이범영 선수에게 선발 자리를 주고 벤치 멤버로 월드컵 본선을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선 조현우 선수가 선발 주전 골키퍼였고 그 당시 벤치 멤버는 지금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 활약을 하고 있는 김승규 선수였습니다. 조현우 선수는 이번 월드컵 예선전에 선발로 여러 번 기용되었지만 현재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본선과는 정반대로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선 벤치 멤버로 16강 진출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조현우 선수의 신들린 선방쇼에 전 국민이 환호하고 들썩였고 전문가들 사이 유럽 진출은 기정사실이었으며 조현우 선수의 개인 사생활까지 화제가 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시절도 불과 몇 년 전인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저는 골키퍼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월드컵 관련 영상에서 조금씩 비지는 조현우 선수를 볼 때마다 ‘속 좁은 나같은 사람이 지금 조현우 선수와 같은 입장이라면 정말 미쳐버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해 봅니다. 골키퍼 포지션의 숙명 같은 흐름들을 조현우 선수도 거스르지 못하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죠.
벤치 멤버분들을 무시하거나 그분들의 가치를 폄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선발 주전으로 경기를 뛰지 않았을 뿐 그분들의 조력과 존재 가치 또한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선수가 그라운드에 뛰지 못하고 벤치에서 경기를 봐야 하는 그 답답함과 함께 프로선수라면 분명히 있을 속상함과 욕심들을 억누르며 함께 원팀으로 견뎌내고 있는 그 시간 속에 고통이 얼마나 클까?에 대한 말씀입니다.
항상 스포츠 경기를 인생에 비유하는 진부한 말씀을 또 드릴 수밖에 없지만 인생의 굴곡과 같은 월드컵 본선 경기 4년마다 바뀌는 국가대표 골키퍼 선수들의 주전 선발과 벤치 멤버 간 이동을 볼 때마다 경외감과 함께 무상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의 평가와 선택에 따라 나의 가치가 결정되는 자리에 있는 많은 직장인들과 사회인들에게 지금 나에 대한 누군가의 평가와 선택이 완전하거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또 다른 누군가의 평가와 선택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고 그것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거나 바꿀 수도 있다는 희망과 기대도 넘칩니다.
이번 월드컵 이후 이번에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지만 다음 월드컵 본선에선 선발 주전으로 뛸 선수들도 있고 과거 선발 주전으로 뛰다 이번에는 벤치에서 월드컵을 함께 하고 이후 국가대표 생활을 마무리하는 선수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번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현장에 있는 우리 국가대표 축구 선발 주전 선수들과 함께 벤치 멤버 선수분들의 소중함과 그 간절함에 관심을 갖고 응원하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 벤치 멤버들의 가치와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응원합니다.
세상은 필드만 조명하지만 그 이면에 조명 받지 못한 벤치 멤버들이 없다면 필드 멤버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