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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 민희진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를 읽고

결국 성공의 척도는 자기검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작년 3월 «비애티튜드»에 게재된 인터뷰 글인데 위기관리 컨설턴트 입장에서 동일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에 곰감하고 많은 깨달음과 자극을 받아 재해석한 생각들을 공유해 봅니다. 민희진 대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나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위한 소중하고 충분한 내용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강박적이고 솔직한 성격 탓에 말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훼손되면 굉장히 힘들어하는 편이에요. 특히 일의 성격상, 맥락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복잡한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통상 인터뷰는 분량 제한이 있잖아요. 제한된 분량 내 충분히 설명하고 맥락을 전달하기 어려워서 인터뷰는 최소한의, 꼭 필요한 경우에만 응해 온 편이긴 해요. 받아들이는 사람이 각자의 이해도에 따라 같은 단어도 각기 다른 개념으로 인식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말을 아끼다 보니 생기는 오해도 있더라고요.


→ 모든 행위는 맥락(CONTEXT)이 중요합니다. 특히 커뮤니케이션은 맥락을 전달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의 맥락을 전달하는데 용이하지 않고 특히 언론은 그것에 아주 취약합니다. 물리적으로 지면과 시간의 한계가 있지만 필연적으로 프레임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달하는 미디어는 그렇다 치고 또 문제는 미디어 리터러시(literacy), 디지털 리터러시라고 하는 청자, 고객, 이해관계자의 문해력, 이해력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오인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항상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이 지점에서 작동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방송에서도 가급적 이전 회사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과거의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이런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가 그간 여러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 과거의 조직과 회사에 대해 항상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용인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불만이 없을 수 없지만 때론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 대한, 자신의 역사에 대한 자해가 되기도 합니다. 과거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은 무조건 나의 과거를 불사르는 행위보다 낫습니다.


제겐 직함이나 타이틀이 중요해지지 않은지 꽤 됐어요. 조직 내에서 역할이라는 개념은 분명 중요해요. 하지만 자발적이라는 전제하에 업무 수행 영역이 애초에 주어진 역할 이상의 것이 되는 순간, 타이틀은 이미 의미를 상실하고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방해 요소가 될 수 있어요.


→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타이틀이 사람을 규정하곤 합니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필요할 수 있지만 또 누군가에겐 그 타이틀이 편견과 선입견을 만들기도 합니다. 기업과 조직의 대표나 수장이면서도 일반적인 타이틀을 거부했던 선배님들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스스로는 ‘K팝 산업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다’는 개념에 의의를 둬요. 시각 요소와 디자인에 한정한 이야기는 다소 작은 개념이지만, 동시대성 측면과 가시성의 관점에서 여전히 주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 요소가 진정한 강점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사실 시각 외의 영역에 대한 이해와 지능적인 융합이 필수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해요. 시각적인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거죠. 업의 근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비즈니스 모델의 확장과 결합을 기반한 새로운 시도만이 오히려 새로운 시각 문화의 지평을 열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어요.


→ 최근 엔터 콘텐츠의 '시각적 요소'는 핵심적인 요소지만 시각 외의 영역에 대한 이해와 융합이 필요하다는 말은 다른 산업 군과 영역에도 핵심 요소 기반으로 진화와 발전을 꾀할 때 통용되는 훌륭한 관점입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금의 형태가 바라던 것인지 모르겠어요. 소통은 상대에 대한 이해를 수반하기 때문에, 사실 여간 어려운 게 아니죠. 애써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비즈니스 측면에서 소비자와 진짜 소통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더라고요. 공들여 만들었는데 오해가 생긴다면 너무 속상할 테니까요. 해법을 모색하고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 소통 만능주의에 대해 여러 번 비판하고 경계해야 한다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강조되고 있는 어쩌면 '쉬운 소통'에 대한 반감과 폐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소통의 도구가 많아지고 소통의 필요성은 더 강조되지만 여전히 소통은 어렵습니다. 왜 어렵냐면 근본적으로 상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알려고 하는 이해와 그 과정이 선행 혹은 동시에 진행되지 않고 진행되는 소통은 말 그대로 일방향적 소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방향 소통이 필요 없다는 말 아닙니다.) 최소한 커뮤니케이션, 소통과 관련해 케바케(case_by_case) 그리고 사바사(사람 by 사람)는 영원한 진리일 것입니다.


일관적이지 않은 잣대도 경험해봤고요. 혹평일 땐 무조건적인 개인 탓을 하다가도 호평이면 ‘혼자 했겠어?’ 한다든지. 그래도 이런 일들은 디렉터의 숙명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여왔어요. 총괄 책임자는 찬사도 비평도 대표로 받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근거 없는 소문은 정신을 피폐하게 해요. 제가 겪는 사회와 세상일 대부분이 씨실과 날실처럼 복잡한 과정과 이유로 엮여 있어요. 단번에 한마디로 요약이 어렵고, 누군가를 단순히 단죄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죠. 이런 복잡미묘한 레이어를 단숨에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다고 생각해요. 꼭 저의 일 때문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잘 모르는 일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문화가 정착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 위기관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특정 이슈의 이면(裏面)을 봅니다. 만인의 비난을 받던 연예인도 공공의 적이 된 정치인도 사회악으로 규정된 기업도 그 쓰나미 같은 거대한 부정 여론이 생성된 출발점에 서 보면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 복잡다단한 변수와 상수가 얽혀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과 대중은 특정 씨실과 날실 하나에만 집착합니다. 그것도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실이면 금상첨화입니다. 최근 '중립 기어'라는 은어로 대변되는 좀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하겠다는 흐름도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고 특히 디지털 미디어 공간 자체가 집단지성이 발현되고 여론을 뒤집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다'라는 다소 거창한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고 매번 말씀드립니다.


특히 저의 이런 디렉팅 방식은 제가 관여하기 이전의 초기 SM 스타일 ― 1세대 아이돌의 성공과 함께 정착된 SM의 상징적 스타일 ― 이 존재했기에 그와 대비되어 흥미로울 수 있었어요. 당시 기존 1세대 SM 스타일의 반대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질적인 느낌과 함께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죠. 산업적 관점에서도 기존 아이돌의 전형성을 탈피한 개념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어요. 내심 그런 반응을 기대하며 나름의 계산하에 작업을 진행했었죠. 통상적으로 집단의 크기와 혁신의 속도는 반비례하기 마련이라,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시도만이 혁신의 인상을 만들 수 있어요. 따라서 모순의 활용, 그 자체로 유효하기보다는 적기와 적소를 파악해 입체적으로 공략하는 방식이 훨씬 영리하다고 생각해요.


→ 민희진 대표가 영리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한 지점 중 하나입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시도를 그냥 '혁신'이라 이야기하지 않고 '혁신의 인상'을 만든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차별화'라는 것이 차별화로 인식될 수 있는 비교 기준점 즉, 과거와 현재의 '전형성'이 존재해야 하고(만들어야 하고) 그것을 탈피하는 개념으로 가시성을 증폭시켜 고객의 주목을 받게 해야 하는데 이 과정의 결과는 적기와 적소를 파악해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혁신이 아니라 '비즈니스적 혁신'의 개념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업무의 효율은 스스로의 목표 의식 수준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억지로 심어줄 수 없는 개념이죠. 타고난 재능이 각자 다르듯, 효율의 방식을 공식화할 순 없어요. 공식화한 대표적인 예가 주입식 교육이죠. 모두 그 폐단을 알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어요. 자발적 깨달음 없이 남이 주입하는 효율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해요.


→ '업무의 효율은 스스로의 목표 의식 수준에서 나온다'라는 이야기는 기업과 조직 내에서 일을 하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다만 전제는 최소한의 조직 업무 시스템의 효율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 그 기반 하에 스스로의 목표 의식 수준에 따라 효율이 배가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새로움을 바란다고 하는데. 진심으로 새로움을 바라는 건지 잘 모르겠기도 해요. 새로우면 낯선 것이 당연하거든요. 그런데 찬찬히 제대로 뜯어보기도 전에, 즉시 낯섦에 대한 불평이나 비판이 선행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해요. ‘시대를 앞선 비운의 ○○○’… 저희 모두 많이 봐왔잖아요. (웃음) 그렇다고 새로운 것이 무조건 좋다거나, 낯선 것이 무조건 새롭고 좋은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에요.


→ 최근 BI나 CI를 바꾼 기업들이 대부분 겪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대중들의 반응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BI와 CI에 대한 초반 반응은 긍정적 반응 보다 부정적 반응이 훨씬 많은데 그 반응들 대부분의 기저에는 '낯선 느낌에 대단 반감'입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수밖에 없는 과정입니다. 부정적 이슈가 많았던 BI나 CI를 돌이켜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다시 익숙함이 낯섦을 사라지게 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눈높이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새로운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뻔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두를 새롭게 만족시키는 건 어찌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신기(神技) 같아요. 그럼에도 본질을 상기하며 새로움을 향해 도전하는 것에 대한 피곤함을 감수하는 것이 제가 하는 노력 같고요. 레이블 대표가 되고 일이 어마어마하게 늘었어요. 중압감이 엄청나 가끔은 해내야 할 일들을 떠올리다 압박감에 잠을 설치기도 해요. 제가 모든 상황을 가늠하고 계산한다고 해도 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하거든요. 하지만 그런 불확실성에 대한 여지를 인정하고 오히려 기대한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겠네요.


→ 위기관리 자체가 최대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예측 가능상 상황으로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민희진 대표의 '불확실성에 대한 여지를 인정한다'라는 자세는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불확실성에 오히려 기댄다는 자세는 상당히 도전적이고 진취적 자세라서 많은 자극을 받았고 실천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하이브에서 의장을 맡고 있는 방시혁 님과 저는 비슷한 면도 있지만, 각자 추구하는 결은 달라요. 그 다름에 대한 필요와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제 레이블을 론칭하게 되었죠. 하이브의 CEO인 박지원 님도 동일한 생각이었고요.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기보다 조직 내 서로 다른 가능성이 공존할수록 성공의 확률은 높아져요. 산업이 어느 정도 고도화되면 기존의 안정적 방식에 안주하는 정체기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지만, 현재 K팝 신이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에요. 새로운 시도가 유의미해지려면 적기가 필요해요. 그래서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고요.


→ 조직 내 의사 결정권자들이 추구하는 결이 다르고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다름이 있다는 것이 성공의 확률을 높인다는 말에 100% 공감하고 동의합니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민희진 대표가 이야기하는 '그 다름에 대한 필요와 인정'이 어렵죠. 여러 사람이 키의 권한이 있는 배가 성공의 방향으로 꾸준히 이동하기 위해선 그 의사 결정권자들 사이 치열한 토론과 경쟁 그리고 그 이면에 양보와 배려가 함께 해야 합니다. 시쳇말로 "동업은 하지 마라"라고 하는 이유는 이익과 손해 사이의 결정에서 양보와 배려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다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헤어지게 되기 때문이죠.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공존과 평화는 50:50이 아니라 49.9999999 : 50.0000001 입니다.


애초 우리가 하는 일은 엔터테인먼트(오락)를 목적으로 하는 일이에요. 기록을 경신하거나 등수를 매기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일이 아니죠. 제가 진정 바라는 건 서로 즐겁게 최선을 다하는 상황을 만들어보는 거예요. 즐겁지 않으면 소용이 없죠. 최선을 다하는 자세도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거든요. 즐거운 마음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비롯되고,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런 노력의 에너지는 분명 다르게 발산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저희 팀의 지향점을 ‘숙련’보다는 ‘즐기는’에 두고 있어요. 진심으로 즐기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는 엄청나게 강력해서 보는 사람까지도 춤추게 해요.


→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 말은 이제 지겹죠.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이 말도 이제 고인 물이 되었습니다. 알지만 그런 상황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한다"라는 말도 최선을 다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하고 저희 구성원들에게 종종 이야기합니다. '최선'의 정의와 기준이 없으면 최선을 다한다는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희진 대표가 이야기하는 '최선을 다하는 것에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이 그래서 너무 와닿고 공감됩니다.


https://beattitude.kr/issue-03/artistproject-minheejin-part1/



제 일에 대해, 혹은 저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이 저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어요. 반박과 정정을 한다 해도 그 또한 상대가 받아들일 태도를 가져야 가능한 일이고요. 그런데 추측도 오랜 시간 방치하니 정설이 되어 이름만 알고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쉽게 매도하기도 하는 등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어요. 애당초 비방을 목적으로 했다면 사실 확인을 한다 해도 의미는 없어요. 실상 타인의 진실에는 큰 관심이 없죠. ‘난 모두가 그렇게 말하길래 그런 줄 알았지’ 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해요. 아이러닉하죠. 저에 대한 모니터링을 안 하는 편이라, 그나마 뒤늦게 알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요


→ 위기관리 과정에서 '애당초 비방이 목적'인 대중과 이해관계자들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특히 연예인들 이슈에 많이 나타나고 일부 기업 이슈에서도 극단적이고 비이성적 비토그룹들이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이 있지만 오직 비난에만 집중하고 나아가서 무릎 꿇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수면 밑에서는 엄청난 고민과 준비를 하지만 수면 위에선 침묵할 수밖에 없는 무대응, 아니 무반응을 보여야 하는 상황들이 많습니다.


 ‘이런 스타일이 먹힌다’, ‘이런 게 정답이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개인적으로 좀 답답해요. 정말 그런 공식이 있다면 일부가 아닌 모두가 성공했겠죠.


→ 위기관리도 원칙은 있지만 정답은 없습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케바케(case_by_case) 그리고 사바사(사람 by 사람)입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정답이라는 공식은 성공의 확률을 조심 더 높일 수는 있어도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자기개발서나 유명인의 명언, 어록 등도 상황과 환경에 맞게 재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개인마다 성공을 판단하는 잣대가 다르잖아요. 그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것 같아요. 자기만족이 우선이라고 하지만 공감 없는 작업은 자칫 개인의 만족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경계해야 해요. 작업의 밀도나 완성도와 무관하게 인기나 명성으로 인해 흥행으로 이어진 케이스 또한 허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성공의 척도는 자기검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자기검열이 되려면 자신을 괴롭힐 수밖에 없게 되고요. 인내 없는 과실은 없다고 하잖아요. 나이 들고 보니 어른들의 말씀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결국 세상에 편하고 쉽고 만족스럽기만 한 길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만 해도 밖에서 보기엔 유명세나 연봉 때문에 부러움의 시선이 있을 수 있는데, 쭉 말씀드렸다시피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거든요. 제가 괴로움 속에서 발견했던 한 줄기 빛은, ‘모두의 잣대가 다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무의미할 수도 있는’ 성공이라는 것에 연연하기보다, 자기만족과 자기검열의 사이에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해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어요. 외롭고 고통스럽겠지만 자기만의 해법과 방식을 고민하며 찾을 때 ‘넥스트 스텝next step’이 보이더라고요. 그 ‘다음’ 스텝이라는 것도 결국 모두에게 해당될 수 없는 나만을 위한 스텝이거든요. 그냥 인생이 그런 거 같아요. 끊임없이 자기만의 다음 스텝을 찾아가는 과정이요.


→ 유명인, 공인분들에게 "위기관리는 자기검열의 연속이다"라고 강조 드리는 입장에서 이 문장들은 구구절절 공감되었습니다. 정말 유명한 사람이 유명세를 치르지 않고 존경받는 경지에 이른다면 일반인들의 몇 배를 더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일반인들보다 특별하다거나 이유 없이 옹호하거나 범법 행위를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유명인이 되면 위기 요소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수십 배 늘어날 수밖에 없고 나를 바라보는 눈 즉, 이해관계자 또한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데 그 상황에서 더 올바른 언행을 하고 오히려 모범적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자기검열의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서 나만의 행복까지 찾는다는 것, 그 경지(?)까지 고민하고 다가가고 있다는 점이 여러모로 대단하네요.


제 친구, 동료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아,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걸까?’ (웃음) 자문자답도 많이 해봤는데, 사실 저는 제 인생에 크게 바라는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좀 하루살이처럼 사는 것 같기도 해요. 먼 미래에 무언가를 이뤄야겠다, 혹은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그런 게 별로 없어요. 그저 단기 목표를 달성하는 게 최우선이에요. 그 목표를 달성하면 어차피 주위 여건이 그에 맞춰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기게 되거든요. 기대감으로 가는 거랄까. 바람이 아닌 상상을 해봐요. ‘와, 이걸 달성하면 그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라고요. 호기심이 동력 같아요. 그래서 가끔은 인생으로 일종의 행위 예술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하고요. 제 인생을 재료로, 해보고 싶은 테스트를 해보는 느낌? 일은 너무 좋아서 한다기보다 어쩌면 그 수단으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어차피 일을 안 하면 인생이 무료하고 심심할 테니까요.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의외성을 재미로 느끼는 것 같고요.


→ "특별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더니 내가 여기서 있더라" 이는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연초 목표만 세우다가 그 거창한 목표와 계획에 괜스레 감화감동하고 감동적인 유튜브 영상이나 강의 듣고 자극만 받지 말고 올해부터는 일단 실행하고 움직여보자구요! :)


https://beattitude.kr/issue-03/artistproject-minheejin-p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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