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고리에 걸려있던 푸른색 망사 주머니

나를 신경써주는 누군가의 호의를 받는다는 것의 의미

by 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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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전장을 누비는 자에게, 본업 밖의 영역에 에너지를 쏟는 일은 사치다.


한때는 나 역시 글을 쓰며 내 관점을 세상에 전시하는 축제 같은 나날을 즐겼다. 창업과 강의, 멘토링을 병행하던 시기였다. 그땐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브런치 메인과 카카오톡 등 매번 글이 링크되며 조회수는 폭발적으로 올랐으며, 구독자는 당시 기준으로 급상승했다.


하지만 나의 앞에 놓인 인생의 선택이 달라지게 되며 글로벌 스타트업의 코파운더라는 무거운 정체성을 입게 된 순간, 나는 기꺼이 작가로서의 나를 그만뒀다.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의 세계를 부수고, 모든 삶의 방식과 태도를 날카롭게 벼려내는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을 글로벌 기준에 맞춰 바꾸며 결국 과거의 나와 완전히 작별했다.


삶은 그 자체로 치열하고 완전했다. 나는 무대 밖의 서포터나 관찰자가 아니라, 피를 흘리며 쓰러지더라도, 이대로 여기서 죽는다해도 무대 위에 서 있는 최고의 플레이어가 되고 싶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전사로서 투쟁하고, 최고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꿈꿀 수도, 도달할 수도 없었던 삶의 너머를 내다보며 존재조차 몰랐던 세상에 진입했다. 좋은 것이 왜 좋은지 경험하고 배웠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비로소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장차 내가 입성하게 될 라이프스타일을 미리 누리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전세계를 무대로 온갖 다양한 경험과 새로운 시도, 특별한 사람을 만나는 것에 집중했다. 온라인에서 글을 쓰는 일은 더 이상 내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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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벽하게 통제되던 내 일상에 파열음이 일어난 것은, 해외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맹그로브의 내 방문 앞이었다.


도어락 손잡이에 푸른색 망사 주머니 하나가 걸려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는지, 신년 이벤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맹그로브에 거주하기는 했지만 1년에 100일 이상은 한국에 없었고 아침에 출근하면 밤 12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삶의 반복이었다. 당연하지만 평일과 주말의 구분은 없다.


입주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코리빙 라이프에 대한 환상은 이미 휘발되었고, 냉소적인 실망만이 남았던 시기.


그저 데스크에 쌓아두고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면 그만일 효율적인 방식을 버리고, 누군가가 내가 부재한 시간 동안 내 방문 앞까지 찾아와 이 번거로운 흔적을 남겨두었다는 사실에 문득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잊고 지냈던 어떤 온기, 혹은 철저히 계산된 내 일상에 침범한 비효율적인 정성이랄까.


돌이켜보면, 이곳에서 보낸 시간, 만난 사람들, 그 모든 특별한 경험들은 내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단지 나의 세계가 너무 커져 버린 탓에, 그들이 제공하는 일상의 호의가 어느덧 내게는 당연한 기본값으로 전락해버렸을 뿐이다.


감동의 역치가 높아져 무뎌졌을 뿐, 이곳에서 내가 살아왔던 시간은 아직도 내 기억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내 마음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닫혀있던 세계에 균열을 낸 것이 바로 이 푸른 망사 주머니였다.


그 작은 과자 꾸러미는 나에게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결코 빚지고 싶지 않았던 정산되지 않은 부채의 청구서였다.




이 공간은 미련할 정도로 많은 것을 내어주며 코리빙이라는 실험을 현실에 안착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달리 현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이 생태계의 이면에는 내가 구독형 소시오패스(Subscription-based Sociopath)라 정의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멤버십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 하나를 무기 삼아 현장의 헌신과 타인의 배려를 아무런 대가 없이 일방적으로 착취한다. 공간이 요구하는 삶의 주체성은 외면한 채, 정서적 무임승차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며 그 어떠한 공헌도 없이, 생태계의 온기를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자들. 그들의 빈곤한 철학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소음들은, 이 실험적인 공간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가장 큰 위협이었다.


나는 그들과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내가 먼저 베풀고, 다가가고,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들여 바닥부터 하나씩 삶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코리빙이라는 라이프스타일, 그 본질을 내 삶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치환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는 것. 타인의 수고를 알아보고, 먼저 미소 지을 줄 알며, 자신이 머무는 공간과 맺는 관계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좋은 사람들과 주파수를 맞추고 공명하며, 내 삶의 한 페이지를 담담하게 채워 나갔다.


나는 이 공간의 사용자가 아니라, 스스로 벼려낸 삶의 규칙을 몸에 새기고, 타인의 헌신에는 리스펙트로 응답할 줄 아는 아비투스 호스트(The Habitus Host)로서 머물렀다.


이 공간에 대해 말할 자격은 거주 기간이나 소속된 곳의 직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단순히 살아봤다고 해서 경험치가 쌓이는 것이 아니듯, 자신의 삶을 던져 공간의 밀도를 채울 용기도 없이 라이프스타일을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믿는 소비자들은 결코 이 심연에 닿을 수 없다. 스스로가 추구하는 자유를 극한까지 누리고, 짐승처럼 한계에 도전하며 기어이 결과를 쥐어본 자들. 오직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며 전진하는 실존적 주권자만이 이 라이프스타일의 실체를 논할 자격을 갖는다.


하지만 모두가 장님 코끼리 만지듯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이 코미디 같은 현실에는, 무임승차자들보다 더 거대하고 지능적인 진짜 흑막이 존재한다.


세상이 이 공간을 기록하는 방식은 기형적일 만큼 편향되어 있다. 실체 없는 환상을 유통시키며 생태계를 오염시키는 자들. 나는 이 모든 정보의 비대칭을 낳은 흑막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이른바, 라이프스타일 브로커(Lifestyle Brokers).


공간의 설계와 운영을 주도한 결정권자라 한들, 그들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본질과 업의 심연을 꿰뚫어 보지 못한 채, 유리벽 너머 안전한 곳에서 공유와 연대를 상품으로 포장해 팔아치우는 자들. 자신만의 우주를 투영한 허구의 커뮤니티를 전제하고 책상 위에서 읊어대는 그들의 담론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이자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삶을 설계하는 혁신가가 아니라, 단지 공간을 쪼개어 수익률을 계산하고 엑셀 시트의 숫자를 바라보는 브로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현장의 마찰력을 지워버린 채 매끄럽게 가공된 기획의 언어들은 누군가를 한번은 혹하게 만들지 모르겠지만, 두번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화려한 이미지와 환상을 담아 유혹하는 수식어 속에는 정작 공간과 충돌하며 진화하는 인간의 기록이 거세되어 있다.


이 공간의 심장부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증명하는 기록은 단 한 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 거대한 수직의 도시, 그 코리빙의 한계치에서 목격하고 쟁취해낸 일상은 매일매일이 축제였고, 감히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나이의 앞자리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결이 동일한 가치관의 만남. 첫 만남부터 5시간이 넘게 쉬지않고 대화한 그날의 추억은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아침 7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선 모임에서 한 명 한 명의 서사를 경청하며 공간의 온도를 데우던 입주민 호스트의 섬세한 기획력과 공감능력은 내가 겪어온 그 어떤 비즈니스 미팅보다 밀도가 높았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라운지, 우연히 마주친 덴마크인과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툰 언어로 서로의 열정과 삶의 궤적을 맹렬하게 교차시키던 밤. 그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공유주방의 1일 쉐프가 되었던 기억.
숨소리만 가득한 피트니스 룸에서 처음 본 외국인과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러닝머신 인클라인을 최대로 높여, 경사도를 한계까지 올린 각도로 심장이 터질 듯 질주하며 발을 내딛을 때. 거친 숨소리 사이로 폭발하던 강한 수컷들의 아드레날린. 국경을 넘어 한계를 돌파하는 원초적인 연대.
세탁실 앞, 절대 인연이 교차할 수가 없었던 낯선 외국인과의 우연한 만남이 운명으로 이어지고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폭풍으로 번져갔던 나날들.


이 모든 것은 엑셀 시트 위의 숫자로 환산될 수 없는, 오직 자신의 삶을 공간의 인프라에 기꺼이 내던진 진짜 플레이어들만이 쟁취할 수 있는 삶의 기록이다.


그 배후에는 좋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게 이끌어준 현장 스탭들의 헌신이 있었다. 맹그로브의 매니저들과 스탭들은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환대, MSC를 비롯한 현장 팀의 디테일한 배려가 바로 진짜 라이프스타일이다.


모두가 가족을 찾아 떠난 텅 빈 명절에 내 문고리에 걸려 있던, 작지만 치명적인 다정함. 설날과 추석, 그리고 새해. 철저히 혼자여야 마땅할 그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그들의 비효율적인 정성은 내 삶의 온도를 기어이 끌어올리고야 말았다.
온몸이 찢길 듯한 타격감을 안고 돌아온 새벽. 누구에게도 약하고 무너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그 기나긴 밤들 속에서, 나를 무장해제 시킨 것은 팥빙수를 준비하는 매니저들의 묵묵한 시선과 MSC 팀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었다.
신선한 식재료를 주워담고 날것의 교감을 나누었던 MSC에서의 시간은 내 삶의 가장 기묘하고도 폭발적인 위로였다. 낮에는 전쟁터에 서서 비정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내가, 밤에는 이름 모를 이들과 밥을 나누고 웃으며 연대했다. 이 극단적 스펙트럼이야말로 이 공간이 설계한 라이프스타일의 가장 우아한 정점이다.


개인의 사생활이 공유되지 않는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들의 서사가 도대체 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가. 반드시 기록되고 공유되어야 할 그들의 노력은 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가.


그들의 그 순수한 헌신과 온기가 조용히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구독형 소시오패스와 라이프스타일 브로커의 서사에는 그 어떠한 탁월한 사유의 시선도 없으며, 철학적인 고민도, 독자적인 세계관도 없다. 흐름도, 논리도, 사례도 없으며 주장만이 가득한 세상. 혹세무민하는 스피커 혹은 자본의 포장지를 거치며 본질은 부정되고, 실체 없는 환상이나 누군가의 감정적인 찌꺼기들만 확대 재생산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진실은,

코리빙이라는 실험의 심장부에 분명 언어로 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 누구도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보여주지 못했을 뿐.


정점을 찍어본 진짜들은 외부를 향해 과도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의 일상에 몰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음을 알기에, 그들은 침묵을 택한다. 하지만 그 침묵의 틈을 타 기록되어야 할 진짜 혁신과 온기는 저급한 소음들에 묻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이 정보의 비대칭이 결국 나를 이끌어냈다.


나는 빚지고 사는 것을 혐오한다. 누군가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무례함이나, 그것을 권리인 양 삼키고 입을 닦는 짓은 내 인생에서 허용하지 않는다.

받은 것 이상의 가치를 취했다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나 역시 그 침묵의 대열에 조용히 합류함으로써, 스스로의 원칙 앞에 정정당당하지 못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정당한 청구서의 결제는, 마침내 시작되었다.


나에게 정산이란 입에 발린 찬사를 읊조리는 것이 아니다. 이 생태계를 오염시킨 가짜 담론들을 걷어내고,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해 내가 마주했던 진짜 현실을 기록하는 것. 맹그로브가 가진 핵심적이면서도 본질적인 가치와 코리빙의 진정한 라이프스타일이 보여줄 수 있는 궁극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가짜들이 점령한 라이프스타일 시장에 던지는 첫 번째 수류탄이 되겠다.

그것이야말로 이 실험적인 공간이 보여준 용기에 대해 내가 지불할 수 있는 가장 비싸고 정중한 대가다.


코리빙이라는 낯선 실험을 어떻게 최고 수준의 라이프스타일로 치환해내는지, 그 격차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생태계의 지난 기록들은 단숨에 정리될 것이다.




이 기록은 내 지독한 확신의 발걸음이다.


타인의 정성을 약탈하는 먹고 째는 무리에 합류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다. 나는 그저, 이 거대한 실험이 저급한 불평들 속에 묻혀 증발하기 전에 압도적 그라비티를 가진 단독자가 누릴 수 있는 일상의 밀도가 무엇인지 완성된 개인으로서 내 방식대로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코리빙은 단순한 주거의 대안이 아니라, 다가올 시대의 가장 거대하고 폭발적인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될 것이다. 애덤 뉴먼과 글로벌 단위에서 시도되는 새로운 실험인 블록체인 코리빙이 검증을 끝내고 국내에 상륙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이 피할 수 없는 넥스트 웨이브(Next Wave)의 한가운데에 내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게 꽂아 넣을 것이다.


이제 커뮤니티란 곧 코리빙이 될 것이며, 그 외의 커뮤니티는 생존을 고민해야 할 시대가 온다.


느슨한 취향의 공유나 온라인상의 허구적 연대는 결코 물리적 시공간을 공유하며 발생하는 바이브를 이길 수 없다. 삶의 인프라가 곧 관계의 인프라가 되는 이 거대한 통합은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이자, 유일한 미래가 된다.


관계라는 추상적인 상품을 팔아치우고, 취향의 파편들을 모아 커뮤니티라 명명하던 조잡한 멤버십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커뮤니티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이름의 환상이 아니라, 삶의 모든 궤적을 투여해야 하는 실존의 영역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전환의 진실은 기획자의 브리핑이나 마케터의 카피에 담길 수 없다. 본질은 나이브한 수사학이 아닌 날카로운 생존의 기록 속에만 존재한다. 오직, 이 거대한 시스템의 한계치까지 돌파해 본 아비투스적 호스트의 기록만이 이 공간의 진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이제 인간의 품격은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밀도로 부딪히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느냐로 증명된다. 서로의 삶이 가장 날카롭게 맞닿는 지점에서 폭발하는 에너지를 통제하고 향유하는 자들만이 다음 세대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다.


그 압도적인 격차의 정점에서,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겠다.


나는 나와 같은 시선의 높이를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진, 탁월한 사유의 능력을 가진 이와 1:1으로 마주앉아 그 시선의 높이를 느끼며 깊게 공감하고 싶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이유로.


그리고 나로 인해 삶의 방향점이 바뀌게 될 어딘가의 누군가를 향해서.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쓴다.


이 글은 내가 누린 압도적 가치에 대해 기꺼이 지불하는 마땅한 정산이다. 그리고 이 부채를 털어내는 과정은, 결국 다가올 거대한 산업의 룰을 재편하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언제까지 이 기록을 이어갈지는 나도 모른다.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내 마음속의 부채감이 이만하면 충분히 갚았다며 결제 완료를 선언하고, 내 삶의 증명이 끝나는 순간, 나는 미련 없이 펜을 꺾고 내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다만 지금은, 문고리에 걸린 이 다정한 선물에 대해 내 방식대로 정중하되 결코 겸손하지 않은 응답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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