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진심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최고의 환대로 맞이해준 소셜다이닝 벗밭 후기

by 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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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많은 온기를 빚지고도, 나는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않았다.


문고리에 걸린 파란 망사 주머니와 무더운 오후의 팥빙수가 거듭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내 의지는 번번이 일상의 소음 속에 무뎌져 갔다.


내 삶의 언어는 언제나 숫자와 결과였다. 퇴근 후 운동하며 머릿속으로만 언젠가 보답해야지라는 위선적인 행복 회로를 돌리는 사이, 현실의 나는 글로벌 시장이라는 전장에서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마모되고 있었다.


효율만이 전부인 비정한 세계, 감정의 마지노선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드러낼 무렵, 지난번 팥빙수 프로그램에서 인연을 맺은 매니저님의 추천으로 낯선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맹그로브MSC : 귤과팥 X 벗밭>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소셜다이닝 프로그램.


낯선 이들이 모여 밥을 먹으며 관계를 맺는다는 이 생소한 모델이 내게는 썩 와닿지 않았다. 느슨한 연대라는 그럴듯한 슬로건으로 포장된, 그저 그런 뻔한 네트워킹 모임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그날 15층 라운지의 문을 열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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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방문한 동대문점의 15층 라운지. 내가 익숙했던 신설점의 실용적인 주방과는 공기부터 달랐다. 탁 트인 공간이 주는 낯선 긴장감 속에서 문을 열었을 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기묘한 풍경이었다.


분명 모집글의 제목은 그저 '귤과 팥'이었다.

내 머릿속의 계산으로는 단출한 과일 디저트 정도가 끝이어야 했다. 그런데 눈앞에 벌어진 판은 내 얄팍한 예상을 완벽하게 비웃고 있었다.


투박한 치아바타와 붕어빵, 그리고 테이블 한편을 지키는 술 한 병. 귤 하나조차 허투루 놓인 것이 없었다. 크기와 껍질의 질감이 각기 다른 다채로운 품종의 귤들 옆에는, 생뚱맞게도 푸릇하고 싱싱한 상추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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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소개글이 프로그램의 본질을 1%도 반영하지 못하는 느낌. 따로 이 MSC프로그램에 대한 후기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서 미리 알아 볼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좋은줄 알았으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을텐데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참 아쉬웠다.


하지만 내가 <맹그로브MSC : 귤과팥 X 벗밭> 을 참여하게 되면서 느끼게 된 그날의 감동과 놀라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홀린 듯 호스트의 안내에 따라 움직였다. 거칠고 담백한 치아바타를 반으로 가르고, 그 위에 싱싱한 상추를 무심하게 접어 올렸다. 두툼하게 썰어낸 버터, 그리고 정성껏 끓여내 가져다주신 두 가지 질감의 팥을 올렸다.


빵과 상추, 버터와 팥.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다양한 품종의 귤.

내 논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이질적이고 기묘한 페어링.


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온전히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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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치아바타를 뚫고 들어오는 묵직한 버터의 풍미, 그 위로 겹쳐지는 따뜻한 팥과 상추의 이질적인 텍스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귤의 산미까지.


절대 우연히 탄생할 수 없다. 단언컨대, 이 기막힌 한 입을 위해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련할 정도로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을 것이다. 디테일에 디테일을 더하고, 한끝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에 노력에 노력을 더하며 살아왔던 나의 지난 삶이 내게 명령한다. 고개를 들어 테이블 너머의 풍경을 제대로 마주했다.


화려한 먹거리보다 내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은 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세 명의 호스트였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한단 말인가.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되는데 왜, 왜 이렇게까지 열정을 불태우려고 하는 걸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대체 뭐가 달라진다고.


고마운 것에 고마워하지 않고, 감사한 것에 감사해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게 세상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 또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리더이자, 모임장이자, 커뮤니티의 호스트로서 그들의 진심을 알고, 느끼고, 마침내 바라보게 되고 말았다. 인간을 좋아하면서도 한없이 인간에 실망해왔던 롤러코스터 같은 지독한 삶의 기록들. 사람을 사람답지 않게 하는 상처와 고통의 껍질을 깨고, 마음속에 깊게 봉인한 어린시절 순수한 마음에 품었던 뜻과 이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 저편에서 끄집어 내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사람들을 단순히 참가자로 대하지 않았다.

식사는 그저 거들 뿐, 이 공간을 지배하는 진짜 코어는 사람을 향한 저들의 에너지에 있었다.

낯선 이방인들을 향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맞이하는 듯한 무해한 미소를 건네며, 그 바쁜 와중에도 일일이 눈을 맞추며 먼저 다가와 대화를 이끌어낸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란 무엇인가.

효율과 성과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토록 맹목적이고 비효율적인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가.

두려움 없이 미래를 향해 소망하는 그 마음은 왜 포기를 모르는가.


이 정도의 치밀한 서사와 식재료 라인업을 준비했다면, 본인들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한껏 생색을 낼 법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스포트라이트를 내려놓고 묵묵히 사람들의 행복을 돕는 호스트의 자리만 지켰다. 굳이 거창한 비전이나 철학을 입 밖으로 꺼내며 포장하지 않아도,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미 완벽한 커뮤니티 그 자체였다.


어떤 마음을 품고 사람을 대하는지, 얼마나 강렬하게 미션 드리븐(Mission-driven)하는 조직인지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완벽하게 대접받았고, 변명의 여지 없이 감동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완벽한 무대 앞에서 나는 문득 화가 났다.


이토록 완벽한 순간조차 결국 휘발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 한구석이 그토록 갈망하던 이상적인 커뮤니티가 눈앞에 실재하고 있지만, 호스트가 땀 흘려 끓인 팥도, 정성껏 귤을 까며 준비한 스토리텔링도 먹고 나면 사라진다.


기록되지 않은 진심은,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내는 일의 고독함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어떤 마음으로 버텨내야 하는지. 그렇기에 누군가 밤새워 빚어낸 이 압도적인 환대가 그저 운 좋은 한 끼로 일회성 소비되고 잊히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문 안쪽에 이토록 수준 높은 위로와 정성스러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맹그로브에서 만나서 친해진 이들, 그 누구도 MSC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은 없다. 바빠서가 아니다. 몰라서다. 그들은 알지 못하기에 영영 이 따뜻한 온기를 놓치고 만다.


세상의 모든 지표와 숫자를 지독하게 기록하며 살아온 내가, 정작 내 삶을 위로해 준 이 완벽한 진심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원칙에 대한 기만이다. 타인의 노고를 일방적으로 소비하고 입을 닦는 짓은 내 방식이 아니다.


문고리에 걸린 파란 망사 주머니와 무더운 오후의 팥빙수, 그리고 오늘 마주한 이 귤과 팥까지. 마침내 운명이 내 멱살을 잡아 이 뜨거운 진실의 전장으로 끌어내린다.


할 수 밖에 없구나.

어떻게든 해야만 하는구나.


나는 빚을 지지 않는다. 내 삶의 선은 내가 정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도망치고 외면해왔지만 결국 난 또다시 깃발을 들어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제발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주길 바랬지만 그 누군가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날 스쳐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알면서도 무시할 수 없고,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


진심으로, 그들이 세상에서 받아야 할 마땅한 대우를 받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직 결과와 숫자로만 증명되는 삶을 살아왔지만, 숫자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이 찰나의 온기를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남긴다. 존중받아 마땅한 이들에게 정중한 경의를 표하는 나만의 방식. 더 이상 바쁘다는 핑계 뒤로 비겁하게 숨지 않기로 했다.


과자상자로 시작해서 팥빙수에 고작 귤과 팥 이야기에 이렇게 비장하게 말하는 것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쉴 틈 없이 삭막했던 내 일상엔, 분명 그 정도의 묵직한 구원이었다.


나는 즐거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겉으로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매번 내가 느낀 감정은 분명 고마움과 감사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어떠한 무엇이었다.

맹그로브의 라이프스타일이 행복했다.


비록, 그 누구도 그 삶의 기록을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해 남기지 않는다 해도.

내가 이곳에서 살아왔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닿을 수 없고, 닿을 수 없다면 원할 수도 없게 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삶의 품격은 결국,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따뜻한 온기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결정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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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dboiled Lifestyle Essay of Mangrove




글을 맺으며,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이 완벽한 환대를 선물해 준 기획자들의 이름을 기록해 둔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속가능한 식문화 플랫폼이라 소개하지만, 그 이상 그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한다. 낯선 이들의 경계를 허물고, 이질적인 것들을 조화롭게 엮어내며, 결국 굳어있던 사람의 마음마저 무장해제 시키는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다.


벗밭 - 지속가능한 식문화 플랫폼

https://butground.com/

https://www.instagram.com/but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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