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쨋월드를 만나 고쳐쓰는 인생이력서 나는 LEE HUMAN이다
#WEB3.0인생이력서LEEHUMAN
#굿짹월드를만나고쳐쓰는인생이력서
이력서를 쓰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글을 쓰는 방식이 손꼽아 몇 개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력서도 창작품이기에 내 맘입니다. 무한히 내 멋대로는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나의 팩트를, 나의 단점 뺀 장점 만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주 잘 볼 수 있어야 하고, 특히 중요한 것은 비전이 보여야 합니다. 요즘 대세인 선한영향력이 보여야 하고, 부합하는 활동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네이버 검색어 '이력서 양식'을 쳐 보니 수많은 이력서 양식이 나옵니다. 주로 이름, 주민번호, 나이, 성별, 학력, 근무지, 주요경력을 적는 형식으로 비슷비슷합니다. 학장님이 원하시는 형식은 아닙니다. 학장님은 일단 mkyu&굿짹월드&챌토링을 통해 변화한 개인의 인생이력서를 원하시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시중의 틀에 박힌 이력서에다가 mkyu&굿짹월드&챌토링 이력을 두 세줄 추가하면 요샛말로 임팩트가 있을까요? 그건 또 아닙니다. 기승전 web 3.0입니다. web 3.0시대에 걸맞은 인생이력서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web 3.0 시대에 걸맞은 인생이력서는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있나요?
2022년 MKYU1학년, 굿짹개근 중인 꼼지랑딸기랑입니다. MKYU홈페이지를 들어가 학장님 말씀처럼 마구마구 눌러 보니 나오네요. 언제 MKYU대학에 가입했는지 확인 성공했어요.(라떼는 이런 게 성취이고 기쁨입니다.) 저는 2021년 12월 13일 04:12:52초에 MKYU대학에 입학했네요. 빠른 입학은 아니지만, 학장님은 2022년 1월 1일부터 514미라클모닝을 계획하고 막 홍보하고 있을 때였던 거 같습니다. 유튜브로 메타버스와 NFT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고, NFT가 뭔지 궁금했던 찰나에 MKYU에서 NFT 강좌를 개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MKYU NFT 첫 강좌 '생애 첫 nft 수업:탄탄한 미래자산 키우기'는 2021.12.13일에 수강신청했는데 몇 시 몇 분 몇 초인지는 안 나와요. MKYU 입학과 한 날 한 시에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MKYU와 김미경 학장님과의 외사랑 인연은 시작되었어요.
2022년 10월 3일 오전 9시 6분 현재 나는 mkyu 대학생이고, 굿짹월드 시조새로 단 하루도 결강하지 않았어요. 굿짹 방학기간에는 챌토링도 충실이 했는데, 최근의 공부는 '허마일님의 DNT: 디스코드NFT트위터' 챌토링 강좌였습니다. MKYU를 첫 입학했던 그 절박함과 강한 호기심으로 지금 저는 여기에 있어요. (MKYU대학생이고, 굿짹월드 시조새로 개근 중이며, 디스코드를 쪼금 할 줄 아는 라떼작가 꼼지랑딸기랑입니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어요.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WEB 3.0속의 '나'입니다. '나의 위치'입니다. '나의 주소'입니다. '온라인 빌딩 주인'이 되었고 나의 온라인 존재감이 내가 하고 있는 그것과 일치합니다. 현생보다 기만하기 어렵고, 현생보다 정직한 나의 존재감. 그것이면 나를 가장 잘 소개하는 '자기소개서'이며 '나의 온라인 이력서'인 것입니다.)
너무 궁금했던 NFT는 이제 대충은 알 게 되었어요. NFT가 내 스마트폰 속 디지털 지갑 속에 3개나 담겨 있습니다. 당시의 NFT 강의명 부제는 '탄탄한 미래자산 키우기'군요. 신청 당시에는 저 문구가 이해도 되지 않았고 암기도 되지 않았어요. NFT만 호기심에 쩔어서 너어무 궁금할 따름이었습니다. NFT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WEB 3.0 공부 과정에서 이젠 NFT에 대한 궁금증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고, 책만 보고 배울 수 없었던 공부였기에 그에 걸맞게 온라인 속에서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저는 WEB 3.0 시대의 LEE HUMAN이 되었습니다.
온라인 기반으로 공부하는 WEB 3.0 휴먼이 되었습니다.
온라인 경제활동을 하는 WEB 3.0 휴먼이 되었습니다.
(온라인 기반 작가가 되었으니, 이것은 가치의 수익화가 된 것입니다.)
온라인 속에서 즐기는 WEB 3.0 휴먼이 되었습니다.
LEE HUMAN이 되었습니다.
*참고: LEE HUMAN 김미경학장 굿짹월드 강의 중에 제시하신 WEB 3.O 생태계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NEW HUMAN을 말합니다. WEB 3.0에서 배우고, 벌고, 즐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현재를 점검하고 나니 이제 나의 WEB3.0 시대에 걸맞은 이력서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2년생 꼼지랑딸기랑입니다. 생까입니다. 1972년에 태어났어요. 당시 서울은 무허가 건물과 철거민을 이주 시키며 도시구역 정비에 한창이었군요. 그해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운동 계획안을 채택했고, 그 유명한 새마을 노래도 탄생했네요. 남진의 임과 함께라는 불후의 명곡도 이해에 탄생했네요. 박사가 드물던 시대라 박사학위만 받으면 신문에 이름이 실렸대요. 세상에! 다이아 비누와 원기소라는 영양제가 신문에 가장 크게 광고가 되었고, '밝은 내일을 위한 새생활 캠페인'시리즈에 폐습의 하나로 치맛바람이 다뤄졌대요. 세상에나! 쥐를 잡읍시다 D 데이, 명보극장 상영작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입장권은 조조가 200원, 연탄가스중독으로 신혼부부 12명 사망, 고정간첩 검거 기사와 야간 통금 위반 단속의 기사 정도면 당시의 삶과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1972년의 그러그러한 분위기 속에 경상북도 영주라는 곳에서 태어났네요. 학장님 덕분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시골 동네에 구판장이라는 곳에 전화한대가 있었고, TV 한대가 있었어요. 전보인지 전화인지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상경한 자녀들의 소식은 그 구판장 전화를 통해서 받았던 거 같아요. 전화 왔다며 이웃이 말해주러 오면 구판장에 가서 찐 계란 먹으며 대기하고, 아버지는 막걸리 한 사발 드시며 전화를 기다리셨지요. 경제발전이 얼마나 빨랐던지, 집집마다 전화가 들어오고 지붕이 개량되고, 작은 소도시의 도로는 나날이 정비가 되었고 지방 유지 댁에는 자가용이 빛나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그때의 기억은 가난보다는 불행보다는, 깻잎머리 물스 바르고 즐겁게 지낸 학창 시절의 기억이 가장 커요. 그때부터는 뭐 1988 덕선이 아시죠? 딱 바로 그거예요. 그렇게 그 분위기였습니다. 88올림픽 전후로 많은 것이 변했죠. 상이군인도 거지도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간 건지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삐삐 차고 대학을 다녔어요. 응답하라 1988에서도 삐삐 호출 받고 달려가는 장면 기억나시나요? 추억의 삐삐네요.
92학번 재수생으로 공부 안 하는 반수 대학생이었던 꼼지랑딸기랑입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공부하지 않았어요. 그림을 그렸어요. 교육대학교도 전공이 있어서 저는 미술교육과 동양채색화를 전공했습니다. 실제는 교육학이 전공이고, 부전공이 미술교육입니다. 아이들을 좋아했고 교육에도 진심이었지만 교육학에 재미는 못 느꼈어요. 그림 그리는 동아리방에서 주로 살았어요. 혼자 늦게까지 그림 그리다가 깜깜한 대학 건물을 빠져나올 땐 좀 무섭기도 했어요. 그림을 그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를 표현하는 게 좋았던 거 같아요. 내 얼굴을 세 작품이나 그렸어요. 당시 동양채색화 인물화가 전공이시던 교수님을 만나서 이기도 했는데, 거울 뚫어져라 쳐다보며 저는 자뻑에 빠져서 '나'를 세 작품이나 그렸었네요. 지금 글도 그저 '나'를 쓰고 있는 거 맞지요? 자뻑에 빠져서 저는 늘 그러는 모양입니다. 나를 그리거나 나를 쓰거나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하늘 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어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식당도 딸려 있던 공무원 독신자 숙소에 들어간지 6개월 만에 남편과 사랑에 빠졌어요.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그동안 꾸준히 아버지에게 병환이 끊이지 않았어요. 본캐 3개, 직장, 엄마, 간병인. 세 개의 본캐로 누구나에게 똑같은 24시간을 살아내자니 하늘 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어요. 결혼할 당시에는 핸드폰을 개통했고 애니콜 같은 걸 사용했던 거 같아요. 남편과 애니콜로 연애를 한 거죠. 둘째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화가로 꾸준히 활동을 했었네요. 대학시절 '나'를 그리며 자뻑에 빠졌었다면, 이후의 작품은 주로 나는 나이지만 내 얼굴이 아니라 '자아'였어요. 추상은 아니어도 구상은 아니었어요. 그냥 나를 그렸지만 내 얼굴을 그리지만 않았던 거죠. 자아를 그리던 그 시절에는 그래도 버틸 힘이 있었어요. '자아'를 그리던 그곳에서 버틸 힘이 나왔던 거 같아요. 육아와 직장과 가족 돌봄에 하늘 볼 시간은 없어도 그림에 매달렸지요. 그런데 둘째를 낳으니 기를 쓰고 붙잡았던 그림도 모두 내려놓게 되더라고요. 아버지는 더 심해지셔서 뇌출혈에 치매 진단을 받으셨어요. 자아가 강했던 나는 아직 남편을 '남의 편'으로 내 편으로 여기지 않았어요. 혼자가 익숙했던 저였던 거 같아요.
2009년~2018년. 모든 것을 내려놓은지 10년, 자존감은 바닥을 드러냈어요. 뭣도 없지만 자존감이 강하던 저였어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유롭게 컸던 저였기에 하늘을 나는게 가능하다며 다리에서 뛰어내리며 놀던 저였기에, 저는 유년시절의 허황된 자유로움과 자존감을 간직했었어요. 대학을 재수하고 아버지의 의견과 반대의 방향을 선택하면서 '자기결정'의 힘으로 자존감은 더 충만했어요. 그러던 저도 무너졌어요. 여자에게 결혼과 육아, 그리고 가족 간병은 모든 것을 비우게 합니다. 붙들수록 수렁에 빠지니까요. 지난날의 자존감을 돌아보면 고통뿐입니다. 모든 곳에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사과해야 했어요. 아이가 잘못해도 나를 쳐다봅니다. 아버지가 부족하면 나를 쳐다봅니다. 심지어 가족인 남편도 그러더라고요. 신기한 운명 속으로 저는 깊이깊이 들어갔어요. 육아만으로 힘들 때는 남편 탓을 할 수 있었고, 시댁에 큰소리도 쳤지만 내 친정아버지가 아프니까 마지막 세웠던 꼬랑지의 터럭 하나조차 서지지 않았어요. 바로 꼬리를 내립니다. '여보 고마워','어머니 감사합니다'그리고, 직장에서도 '늘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랬습니다. 인격은 이제 겨우 2층에 있는데, 63빌딩 스카이라운지만큼이나 고결한 인격으로 행동해야 했어요. 뭘 감사하고 뭘 죄송하고 뭐가 고마운 걸까요? 의문은 잠시 안녕! 저는 늘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를 메들리 했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사회적인 행동이었어요. 예전엔 직장에서는 콧대가 높았는데, 직장에서도 이젠 무조건 죄인입니다. 아이들이 완벽하지 않은 그만큼 선생님은 죄송하고, 미안하고, 잘못합니다.
2019년 12월. 숨 막혀 떠났던 유럽 자유여행이 진짜 나를 살렸습니다. 책임의 무게에 주저앉은 자존감으로 나는 신음했어요. 분노와 절망에 떨었던 거 같아요. 옆에서 지지해 주는 친정엄마가 없던 저였어요. 아버지는 힘이 되면서도 동시에 무거운 짐이었어요. 두 아이도 더 이상 이쁘지가 않았고, 세상이 무거운 짐으로만 느껴졌어요. 끊임없이 내어 주어야만 했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피폐해져 갔던 거 같아요.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아아주 쬐애끔 밖에 못 느낄 즈음, 저는 살고자 여행을 떠났어요. 유럽 왕복 비행기 티켓과, 3일간의 숙박 예약을 해 두고, 3일 치의 옷가지만 챙겨서 저는 9박 10일의 유럽자유여행을 떠났어요. 혼자서요. 자유로웠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고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싶었어요. 아버지는 시어머니가 돌봐 주시기로 했고, 남편도 다녀오라고 격려해 주었어요. 그렇게 그곳에서 빈둥빈둥 빈둥거렸어요. 거리를 헤매고 다녔고, 버스를 타고 헤매고 다니기도 했어요. 루브르 박물관을 간 것도 에펠타워를 보러 간 것도 아니었어요. '나'를 찾으러 간 여행이었고, '나'를 찾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기를 안은 부부가 가제수건을 삼중으로 겹쳐 입을 막고 마스크를 했더라고요.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온 남편과 두 아이도 마스크를 썼어요. 코로나19가 닥친 거였어요.
2020년 4월부터 선생님도 학생도 학교가 아닌 집에서 ZOOM으로 수업을 하라고 했어요. 마트도 QR코드로 코로나없음을 인증하라고 하고, 카페는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고 했어요. 2021년 가을까지도 곧 코로나 19가 사라지겠지 하고 차일피일 허송세월을 보냈어요. 사실 그 사이 2021년 1월 부터 온라인 교사성장학교 고래학교에 입학했고, 새벽기상을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어차피 모든 것이 온라인만 가능한 코로나 19 대유행의 시기였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이 모든 것은 온라인에서 이루어 졌지요. 이미 온라인으로 WEB 3.O을 준비하며 변신완료하신 최선경선생님은 저의 멘토였어요. 2021년 1월 부터는 열심히 새벽기상하고 온라인 기반으로 선생님들의 커뮤니티는 자기계발과 변화를 이루어 가고 있었고 저도 그 변화의 흐름에 비집고 들어가 합류했던거 같아요. 그렇게 그냥 새벽기상하고 블로그에 글 쓰고 카페에 인증하며 본격적으로 다가올 WEB 3.0 시대의 온라인 기초체력을 기르고 있었던거 같아요. 함께 독서모임도 했고 무너졌던 자존감을 치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코로나 19는 곧 종식될 것이고 온라인 고래학교에서 잠깐 즐거웠던 것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고, 다시 이전의 삶의 패턴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착각했어요. 스마트폰이 딸린다는 생각에 고사양의 스마트폰으로 바꾸면서 유튜브프리미엄을 무료로 가입해 주기에 유튜브의 좋은 강좌들을 많이 보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에 빠져 미래예측에 관한 전문가들의 예측을 관심을 갖고 들을 수 있었어요. 곧 사라질 것 같던 코로나 19는 사라질 기미가 없던 찰나에 김미경학장님의 유튜브 강좌를 듣기 시작했어요. 블로거 허점순토속된장할매님은 김미경학장님을 30년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데 저는 귀막고 눈감고 살던 10년 동안 아무것도 몰랐어요. 학장님 강좌는 2020년 가을부터 자주 들었어요. 특히 아이 낳고 주저않지 말고 공부하라는 메시지는 저를 들어올렸습니다. 그리고 세븐테크, 메타버스, 포노사피엔스, WEB3.0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블록체인은 또 뭐고 NFT는 뭔지 궁금했어요. 뭐길래 미래를 예측하는 교수님과 박사 과학자들이 하나같이 저래 떠드는 걸까 궁금했어요. 이제 더이상 남부러울 것 없으신 김미경학장님을 저렇게 들뜨게 자극하는 것일까 궁금했어요.
2022년 MKYU 1학년 신입생으로 입학하고, 굿짹월드 시조새로 매월 1일부터 14일 새벽 5시 514챌린지에 빠짐없이 개근 중인 꼼지랑딸기랑입니다. 저는 2021년 12월 13일 04:12:52초에 MKYU대학에 입학했어요. MKYU NFT첫 강좌 '생애 첫 nft수업:탄탄한 미래자산 키우기'는 2021.12.13일에 첫 수강신청했는데 몇 시 몇 분 몇 초인지는 안나와요. MKYU입학과 한 날 한 시입니다. 굿짹 방학기간에는 챌토링도 충실이 했는데, 최근의 공부는 '허마일님의 DNT: 디스코드NFT트위터' 챌토링 강좌였습니다. 한편 3월 챌토링이었던 '일비블로그 습관'은 저의 인간관계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저의 이력서에는 한 줄이 추가 됩니다.
LEE HUMAN 작가꼼지랑딸기랑입니다.
카카오톡도 오늘 잘 안 보고,
답글도 내일 하던 라떼가,
손꾸락도 느린 라떼가,
NFT 에어드랍 3개를 받았어요.
HOLDER PARTY에도 초대됬어요.
LEE HUMAN 맞나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LEE HUMAN 꼼지랑딸기랑의 WEB 3.0 커뮤니티인 굿짹월드 네이버 카페에 제출할 저의 STORY TELLING이었습니다. 작가 꼼지랑딸기랑은 굿짹월드에 이력서 제출합니다. 감사합니다.
*참고: LEE HUMAN 김미경학장 굿짹월드 강의 중에 제시하신 WEB 3.O 생태계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NEW HUMAN을 말합니다. WEB 3.0에서 배우고, 벌고, 즐기는 사람들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