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철,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 극장> 중에서
작은 별 하나가 물랭루주에서 뜨고 졌다. 뚤루즈 로트렉. 작은 키 콤플렉스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낸 나 자신의 열등감이 그에게 투영되어서였을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서 접할 때마다 그의 페이지는 접어두고 멀리하고만 싶었다. 그러던 내가 그를 깊이 만난 것은 2020년 예술의 전당 <물랭루주의 작은 거인 : 뚤루즈 로트렉 전>에서였다. 전시회를 보러 가고 싶다는 첫째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방문한 그곳. 우연히 접한 전시였으나 후에 나머지 아이들도 설득하여 다시 한번 방문했을 정도로 전시 관람 후 감동은 컸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로트렉의 삶과 그림이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인간은 추하지만 인생은 아름답다."
불안한 전조
1864년 11월, 남프랑스 알비. 강한 비바람이 치고 스산한 기운이 가득했던 그날, 한 아이가 태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기의 출산을 기다리던 자들은 불안한 전조를 느끼고 초조해졌다. 그러나 아기는 예쁜 모습으로 태어나 프티 비주(Petit Bijou) 즉, 작은 보석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하지만 아이의 행복한 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는 농축이골증이라는 선천성골계통 질환을 가지고 태어나 뼈가 약했다. 이것은 근친혼에서 비롯되는 유전병이다. 아이의 집안은 잘 나가던 귀족이었고,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12세기부터 근친혼으로 대를 이었다. 로트렉의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는 사돈 이전에 친자매였고, 로트렉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종사촌 간이었다.
부상, 그리고 멈춘 성장
로트렉은 열네 살 때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발을 헛디디어 왼쪽 다리가 부러진다. 그리고 다리가 다 나을 때쯤 다시 오른발이 도랑에 빠져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진다. 그 후 성장이 멈추고 키가 150cm 즈음에서 더 자라지 않는다. 아들의 병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냉정하고 매몰찼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라면 함께 말을 타고 사냥을 다니려고 했었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이 멈추고 만,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아들을 철저히 외면한다. 로트렉은 귀족사회에서도 따돌림을 당했고 친구도 없었다. 그는 그 당시 할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하루에 많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책도 조금 읽는데 오래 읽으면 머리가 아픕니다. 되도록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드로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립니다. 어두워지면 사촌 잔 아르마냐크가 내 방으로 들어올까 봐 신경이 쓰입니다. 가끔 그녀는 램프를 밝게 켜고 나와 놀고 싶다고 말합니다. 나는 얘기는 듣지만 (그녀의) 얼굴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매우 키가 크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키가 작고 잘생기지도 않았습니다.
- 이유리 <화가의 출세작>(p127)
그리고 또 그리다.
그는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순간부터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의 관찰력은 날카로웠고 그의 손놀림은 재빠르다. 그는 자신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것 때문에 움직이는 것들에 몰두한다. 말과 마차, 사냥하는 모습 등 역동적인 순간들을 화폭에 담아낸다. 그러나 풍경은 그에게 별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의 인생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련은 없다.
나는 풍경에 대해선 그림자조차도 그릴 수가 없다. 내가 그린 나무들은 시금치처럼 시퍼런 녹색일 뿐이다.
- 이유리 <화가의 출세작>(p127)
스승과 친구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로트렉은 인간관계에서 무시와 차별, 동정의 시선을 경험하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다. 미술을 좋아하는 로트렉에게 어머니는 르네 프랭스토라는 청각장애를 가진 미술 교사를 소개한다. 그는 그에게 마음을 열고 그림을 배운다. 프랭스토는 동물 전문 화가였는데 자신만의 기법을 로트렉에게 아낌없이 전수한다.
로트렉의 재능을 알아본 프랭스토는 당시 상류층 전문 초상화가였던 파리의 레옹 보나 화실을 추천한다. 로트렉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정식 미술 교육을 받는다. 그 후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로 옮겨 사람의 신체를 그리는 법을 배운다. 로트렉은 코르몽의 화실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며 서로의 그림 스타일에 영향을 주고받기도 한다.
로트렉이 존경한 화가는 에드가 드가였다. 그는 드가로부터 대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드가는 로트렉이 자신의 스타일을 따라 한다며 그를 싫어했는데 나중에는 로트렉이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로트렉은 내 옷을 가져가서 자기 몸에 맞게 재단해 버렸다."
- 정우철,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극장>(p97)
물랭 드 라 갈레트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찾은 로트렉이 용기를 내 귀족사회를 박차고 나가 찾아간 곳은 물랭 드 라 갈레트였다. 물랭은 풍차라는 뜻으로, 거대한 풍차를 단 건물 옆 광장에서 사람들은 무도회나 식사를 즐겼다. 물랭 드 라 갈레트는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카바레였다. 시간이 지나자 그곳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몽마르트르 거리에 새롭게 단장한 물랭 루주(빨간 풍차)를 찾아 유흥을 즐긴다.
몽마르트르, 소외된 자들의 거리
당시 몽마르트르는 술과 도박, 매춘이 일상인 환락가였다. 소외된 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로트렉은 난생처음 자신을 힐끗거리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뿐인 사람들을 만난다. 로트렉의 장애는 본디 그들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던 것처럼, 그들은 로트렉을 주목하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삶이 지치고 힘겨웠던 그들은 로트렉을 주목할 여력이 없었다. 귀족사회에서 겪은 냉소로 귀족에게 환멸을 느꼈던 로트렉은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임을 깨닫는다.
물랭루주 홍보 포스터를 맡게 되다.
로트렉은 물랭루주 사장을 만나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그려줄 테니 부탁을 들어줄 것을" 제안한다. "부탁은 두 가지였는데 물랭루주의 무대 맨 앞자리는 자신이 언제든지 앉을 수 있도록 비워둘 것, 그리고 끊기지 않게 술을 계속 가져다줄 것. 돈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도 덧붙"(p109) 인다. 그 후 로트렉은 물랭루주에서 만난 사람과 사건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1891년. 그는 '물랭루주'의 새로운 공연 '라 굴뤼와 발랑탱' 광고 포스터 제작을 맡게 된다. 세련된 선으로 그려낸, 가스등 아래의 댄서. 어두운 실루엣으로 처리된 관객들, 일본 에도 시대 목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가면 같은 얼굴, 불필요한 인물 세부 묘사 대신 단순화한 캐리커처, 반복되는 글자, 선의 강약 처리, 단순한 색채들이 주를 이루는 그의 포스터는 당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후로도 로트렉이 제작한 포스터들은 장안의 화제가 된다.
고달픈 자들의 일상 속으로
로트렉이 더 깊은 일상 속으로 들어가고자 선택한 곳은 매음굴이었다. 당시 매춘여성은 하층민 중에 가장 낮은 자들 부류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름다운 장신구 등으로 치장한 모델이 아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고달픈 매춘 여성들의 일상을 찾아 그들 속에 자리를 잡고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그려낸다. 짧은 머리의 여인들.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아야 했던 그들의 삶의 고단하고 힘겨운 모습들이 로트렉의 그림을 통해 전해진다.
앙상한 뼈만 남은 가냘픈 여인의 몸단장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몸단장>이라고 로트렉은 말하는 듯하다. 그녀가 가진 것은 돈의 수단이 된 몸뚱아리 하나.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웃음은 허하다. 오히려 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웃고 떠들어야 하는 그들의 삶. 누군가에게 보일 앞모습을 치장해야 하지만 정작 자신이 치장할 이유를 찾지 못해 망연자실한 여인. 살아갈 이유도 힘을 낼 이유도 없는 그녀. 웃고 또 웃지만 채워지지 않는 텅 빈 가슴. 그 허탈함을 가슴속에서 비우고자 화려하게 치장하고 단장해도 보이는 것은 그녀의 고달픔과 고독함. 따스함도 온기도 늘어진 옷 사이 어디론가 숨어버려 차디차다. 화려함 뒤에 감춰졌던 그녀의 뼈와 살은 부서질 듯 아파 보이고 파리하고 핏기가 없다. 그녀의 몸을 버틴 팔의 가녀림이 애처롭다.
로트렉이 가까이서 본 그녀들은 이처럼 고달프고 애처롭고 서러움이 가득했다.
프티 비주(Petit Bijou). 별이 되다.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의 여인들처럼 자신의 모습이 서럽고 애처롭다 느꼈을 수 있다. 또는 자신의 마음 아픈 현실을 잊고 싶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 압생트는 '녹색 요정'이라는 별명을 가진 알코올 도수 60-70도의 술로 신경계통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판명되어 1915년 프랑스 정부는 이를 마약으로 규정하고 판매를 금지한다. 마시면 환각증세가 있는 이 술은 당시 빈센트 반 고흐, 고갱, 모딜리아니 등 파리의 예술인들이 즐겨 마시기로 유명했다. 그들의 중독이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신과 영혼은 날로 피폐해졌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걱정해 해군 출신의 폴 비오를 붙여 아들이 압생트를 마시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그러나 로트렉은 그의 감시를 피해 압생트를 마셨고 길거리에 쓰러질 지경에까지 이른다. 로트렉의 친구들의 권유로 어머니는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퇴원 후에도 계속 중독으로 치닫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남겨진 것들.
그의 삶이 끝났을 때, 그저 세상에 살다 간 한 사람의 아픔에서 끝날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가슴앓이를 한 그의 흔적들은 그가 남기지 않았다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독과 아픔 서글픔을 자신이 관찰한 대상들 속에 표현했고 그의 삶 뒤에는 그것들이 남겨졌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그림 속에서 아픔과 고독, 절망, 고통 그리고 그 모두를 뛰어넘는 재치를 본다. 그가 살아생전 남긴 포스터, 석판화, 드로잉, 스케치, 일러스트 및 수채화 등의 작품은 무려 5000여 점에 달한다. 이 흔적들이 남겨지게 된 데는 그의 어머니의 공이 컸다. 이 모든 것들은 그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여 보살폈던 어머니, 아델로 인해 보관되어 미술관에 기증 후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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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20년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회를 접하기 전에는 그의 그림이 좋았다. 그러나 전시회 후에는 그의 삶 이야기가 좋아졌다. 단지 그의 아픈 이야기들이 해피엔딩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깊은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키가 작았지만 가족들이 함께 사랑해 주고 재능을 마음껏 펼쳐 아름답게 살다 간 인생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의 예술적 영감이 보이는 그림들이 우리에게 전해졌을까는 의문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 내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난 결코 그림 따윈 그리지 않았을"(이유리, 화가의 출세작, p124) 테니 말이다.
안타까운 그의 불행했던 삶은 그 안에 숨어 있던 잠재력이 빛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별. 그는 죽었으나 그가 그려 놓은 그림 속에서 뜨고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