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미술 일상

디자인의 속살, 인문학

최경원, <디자인 인문학>을 읽고

by stray
"토머스 하인의 <토털 패키지>에 따르면, 상점에서 진열대를 돌아다니는 한 사람이 1800초 동안 약 3만 개의 품목을 본다" (p12)


이처럼 지금은 디자인 풍요시대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온통 디자인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 몸에 닿는 옷과 화장품, 베개, 이불 등의 침구류부터 지갑, 가방 등의 생필품, 냉장고, 청소기, 세탁기 등의 생활가전, 컴퓨터, 프린터, 스피커와 핸드폰 등의 전자기기, 피아노와 책장에 꽂힌 책들, 문구류, 집, 차, 도로 표지판과 거리의 간판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의 옷을 입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에 담긴 각각의 디자이너들의 솜씨와 재능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상을 무미건조하게 살아간다. 디자인은 이미 우리 일상의 일부이며 삶이기에. 이러한 디자인의 세계는 현대로 올수록 점점 더 깊고 심오해진다.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디자인된 상품들이 세계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의 디자인은 '절박함'을 가지고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2차 대전 이후 물자가 부족하던 시기에는 냉장고, 청소기, 세탁기 등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갖춰 이러한 물건들을 대량으로 생산해내기만 해도 소비자들은 만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기술과 생산체계를 의존하는 시기가 아니다. 물건은 넘쳐 나고 소비자들은 점차 인간의 보편 가치를 담은 물건들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정보와 함께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은 이제 '소비'만 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의 목적에 따라 디자인을 '선택'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p24)


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물건을 선호하는 인간은 바로 보편 인간이다. "보편적인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p26)이다. 그러므로 디자인 이용 주체인 사람들과의 '소통'과 보편적 인간 '이해'를 위한 시대적 요구로 디자인은 인문학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디자인에 인문학 바람이 분다. 그러나 인문학은 이미 디자인 안에 존재해왔다.


시각적 조화를 이루어 심미적 기능을 살린 디올의 존 갈리아노의 화려한 <의상>과 톰 딕슨이 추구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인테리어>, 개성의 표현, 아이디어가 빛나는 메타 피스의 <노드>, 스테판 디에즈의 <벤트>, 세계에 대한 이해를 지닌 덴마크 주방용품 디자인 회사 에바 솔로의 <피자 커터>, 스타니슬라브 카츠의 <책장>, 영혼을 흔드는 감동을 주는 디자인으로 안도 타다오의 < 빛의 교회 >, 노먼 포스터의 <거킨 빌딩> 등 인문학적인 바탕 위에 세워진 디자인들은 세계 구석구석에서 이미 빛을 발한다.


노먼 포스터(Norman Poster), 거킨 빌딩(The Gherkin)

이 중 노먼 포스터(Norman Poster)가 설계한 거킨 빌딩(The Gherkin)은 영국 런던 도심 중심에 위치한다. 스위스 보험 회사 소유의 건물로 오이지를 닮은 모습으로 인해 거킨(오이지) 빌딩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총알처럼 솟은 둥근 유리 건물. 높이 180미터의 고층 건물의 등장은 역사와 전통이 함께하는 주변과의 조화보다 위압감을 줄 것에 대한 우려로 건축의 시작 전 여론의 반발이 드세었다.


하지만 노먼 포스터는 철저하게 주변과의 공생을 고려해 디자인함으로 부정적인 여론의 우려에 답했다. 외벽을 곡면으로 설계함으로 주변 건물들의 일조권을 확보하며, 외관의 모서리를 둥글게 함으로 건물에 부딪힌 바람이 부드럽게 흘러 건물 사이를 걷는 보행자들과 주변에 편안함을 주도록 했다. 또한 하부로 내려갈수록 잘록해짐으로 1층 밖 공간에 여유를 두었다. 또 외벽은 이중 유리로 만들어 단열효과를 높여 같은 부피의 건물보다 에너지를 40% 경감시키는 효과를 낸 친환경 건축물이다. 거킨 빌딩은 보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결과이다.


이처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문학적인 바탕을 내재화하게 된 디자인은 그 역사의 초기에는 주로 형태와 기능이 주를 이루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고 주장했던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의 말처럼 20세기 디자인은 전적으로 기술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서 디자인의 기술 의존도는 상대적으로 낮아졌다."디자인을 만들던 기술과 상업성은 이제 그 디자인의 필수요소는 아니다. 좋은 디자인은 기술 실현뿐 아니라 사회적 상황과 예술성 같은 가치를 지녀 기술과 상업성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p70)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는 예술 심리학의 거장 루돌프 아른하임의 말에 주목한다. "우수한 의상 전문가나 미용 전문가의 기술은 사람의 풍채를 만들며, 실내 장식가나 조명 디자이너의 기술은 방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또는 우아하게 만든다. 그들이 기술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면, 그것은 실패라는 사실을 기억하자."(p70)


디자인은 외적 요소인 형태와 색상, 그리고 내적 요소로 문화 인류학적, 철학적 가치와 감동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디자인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세상과 역사이다. 세상 속에서 디자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스페인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처럼 디자인이 도시에 선한 영향을 미친 사례도 있고 중국집 배달용 철가방처럼 세상이 생활의 필요에 의해 만든 디자인도 있다. 또한 디자인으로 사회를 비판하기도, 치유하기도 한다. 또한 스페인이나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세계 각국의 역사와 전통은 그 나라 나름의 디자인 양식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다양한 다자인의 현재적 상황 속에서 기술과 상업성을 넘어 나아가야 할 디자인의 방향은 어디일까? 저자는 디자인이 주목해야 할 방향을 '인문학적 태도'라고 본다. 디자인 안에 이미 내재된 인문학적 바탕을 발견하는 '통찰력'을 통하여 앞으로의 '비전'을 발견해 가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디자이너들의 과제임을 말하며 글을 맺는다.


그는 디자인은 인문학의 뿌리인 철학과 우주관을 담은 꽃이라고 말한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재치, 세계를 담아 자신들만의 꽃을 피워낸다. 인문학을 담은 디자인 세상에는 인류 보편 가치인 사랑과 정의, 진실의 꽃이 지금보다 더 활짝 피어나기를 마음속에 바라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