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철, <도슨트 정우철의 미술 극장> 중에서
그림 출처: http://www.muchafoundation.org/무하재단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일어난 아르누보(Art Nouveau)는 새로운 예술을 뜻하며, 예술의 일상성을 추구하던 미술의 한 분파였다. 그들은 18세기 고전과 20세기의 팝아트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미술사적 평가를 얻는다.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예술의 일상화를 목표로 했던 팝아티스트들의 원조격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누보의 대표작가는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와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체코 출신의 알퐁스 무하이다.
신비로운 색채와 신화에 등장할 듯한 매혹적인 여인의 분위기, 자연에서 영감 받은 꽃과 곡선의 배경들. 무하의 그림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길 가던 사람들도 그의 그림 앞에 멈춰 서게 한다. 무하의 포스터가 거리에 걸렸을 당시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림을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그 포스터를 떼어 자신들의 집에 가져가는 일이 허다했다는 이야기는 그 사실을 입증한다. 가던 길도 멈추게 할 만큼 매혹적인 그림을 그렸던 그는 누구였을까?
무하의 탄생
그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다짐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천사를 만난다. 그녀는 천사로부터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이 너에게 올 것인데 그 아이들을 잘 보살피라는 말을 듣는다. 그 후 그녀는 아이가 셋이 있는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고, 1860년 체코 모라비아에서 무하를 낳는다. 장난감이 흔치 않던 시절, 그녀는 무하가 걸음마도 떼기 전에 그에게 장난감 대용으로 연필 목걸이를 선물해 준다. 아기 때부터 그 목걸이 연필로 그림을 수도 없이 그렸던 그는 8살이 되어 예수의 수난(crucifiction,1868)이라는 그림을 완성한다.
무명의 시간은 준비의 기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무하가 학교를 졸업하고 성년이 된 후 바로 유명한 화가로서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그는 아버지의 추천으로 법원서기로 일을 시작한다. 그 후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공방에 소속된 장식화가로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하가 일하던 극장에 불이 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마을에서 귀족의 초상화를 그려 주는 일을 하며 지내던 중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한 귀족의 후원으로 파리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이라는 사립 미술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은 후원을 끊고 무하는 생계를 위해 취직을 하게 된다.
성실의 자리, 르메르시에
르메르시에는 무하가 생계를 위해 취직한 인쇄소 이름이다. 그 인쇄소는 각종 포스터나 리플릿 인쇄물에 들어갈 그림을 맡아 그려주기도 했다. 무하는 인쇄소에 소속된 메인 아티스트를 보조하는 서브 아티스트 중 하나로 20대에 파리에 도착해 30대가 될 때까지 서브 아티스트로 시간을 지낸다. 그는 자신이 서브 아티스트라고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더 연습을 하겠다며 쉬지 않고 날마다 일하러 갔다. 아마추어는 영감을 기다릴 때 프로는 그저 일하러 갈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성실함으로 그의 서브 아티스트로서의 자리를 이어갔다.
만남, 그리고...
무하와 사라 베르나르와의 만남은 오랜 시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성실함으로 인생을 살아가던 무하를 한 순간 스타의 자리로 끌어올린다. 사라는 당시 유명 배우 겸 감독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 출연하게 될 <지스몽다>라는 연극에 쓸 포스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 포스터 시안을 받아오라고 매니저를 르메르시에로 보낸다.
1894년 크리스마스이브, 온 도시가 휴가철을 맞아 고요한 때 자신의 성실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무하에게 그 기회가 온다. 사라의 매니저는 휴가철에도 집으로 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무하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포스터를 만들어 줄 수 있는지 묻는다. 무하는 대배우의 연극 홍보 포스터를 메인 아티스트 없이 혼자 해 본 적 없으나 물러서지 않고 수락한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는다. 기회를 잡아 기적으로 만드는 사람은 하루하루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갈고닦은 사람이다. 사라 베르나르는 포스터를 보자마자 자신이 본 포스터 중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하며 무하의 포스터를 극찬한다.
포스터도 예술이 될 수 있나요?
무하의 <지스몽다> 홍보 포스터는 파리 시내에 붙은 지 하루 만에 모두 사라졌다. 사라 베르나르가 알아본 무하의 재능을 파리 시민들도 알아보았다. 사라 베르나르는 포스터 4000부를 추가로 제작, 판매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이후 사라는 무하와 6년 전속계약을 제안하여 사라에 관련된 모든 포스터는 무하가 그리기에 이른다. 당시 '이류 미술' 정도로 인식되었던 포스터나 장식품 같은 실용미술 작업에도 무하는 순수 예술과 다름없는 예술성을 보여 주었고, 대중은 무하의 예술성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다.
예술의 일상화를 꿈꾸었던 무하
포스터는 더 많은 대중을 계몽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일하러 가는 그들은 멈춰 서서 포스터를 보게 될 것이고, 정신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를 바란다.
- 이유리, <화가의 출세작> (p22)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비추는 빛이 되었으면 했던 무하. 무명 시절에도 여전히 그의 예술성은 빛나고 있었다. 그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르누보 거장으로서의 알폰스 무하의 명성은 재능을 무기로 삼아 게으르지 않으며 자리를 지킨, 타고난 성실과 꾸준함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