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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미술 일상

책에서 만나다: 간송 전형필

이충렬 <간송 전형필>을 읽고

by stray

* 사진 출처: http://kansong.org 간송 미술 문화 재단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벅차오르는지요?’ ‘제가 선생님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왜 문화재 수집에 억만금을 쏟아부었는지, 어떤 번민과 고통이 있었는지, 선생님이 수집한 문화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오늘의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 이충렬 <간송 전형필> (p6,8)

저자 이충렬 씨의 방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전기 <간송 전형필>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악기의 울림이 듣는 자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듯, 당대의 위인들의 삶 이야기는 듣는 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그로 인한 감동을 준다.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간송 전형필의 삶이 그러하다.


“내가 모으다 해방을 못 본다고 해도 너희들 대에서는 해방이 되겠지.....
내가 왜 조선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미친 듯이 모았는지
너희들의 세상에서라도 알려다오.”
- 이충렬 <간송 전형필> (p327)


그는 살아생전에 그의 재산 전부를 바쳐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지켜 보존한다. 그를 통해 모인 물품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지어 놓았던 간송 미술관에 잘 보존되어 후대인 우리에게까지 전해진다.


미술관 덕분에 그는 간송이라는 호로 더 유명하다. 간송은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라는 뜻으로 선비의 청렴함과 변치 않는 의리를 강조"(p76)한 이름으로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 선생께서 지어주신 것이다. [논어] {자한 편}에 ‘세한연후 지송 백지 후조’ 즉,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p75)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은 이미 우리나라 몇 안 되는 부호 중 하나였다. "친부와 양부의 유일한 상속자인 전형필은, 매년 기와집 150채 상당의 수입을 보장하는, 기와집 2천 채 상당의 가치가 있는 논을 상속받으면서 백만장자가 되었다."(p79)고 하니 그는 준비된 부자였다.


그는 그가 가진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나 일본 유학 이후 휘문고교의 스승 고희동 선생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 "선조들이 남긴 그림, 글씨 책 도자기는 우리 민족의 혼이자 얼"(p85)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후, 그의 마음속에는 일본의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나라의 작품들을 지켜내고 싶다는 생각이 불길처럼 타오른다.


위창 오세창 선생은 전형필이 단순한 수집이 아닌 유산 보존의 가치를 알 수 있도록 서화 작가와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연결시켜 공부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당대 서화 전적의 진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도록 세심하게 지도한다.


전형필은 이후, 한남서림을 통째로 인수한다. 이곳을 기점으로 그는 이순황과 일본인 신보상과 함께 우리나라의 유명 작품들을 사 모은다. 또한 수장품을 보관, 진열, 전시할 박물관을 짓기로 결정, 지금 성북동 위치에 땅을 사서 1938년 간송 미술관(당시 보화각)을 짓는다.


그는 천학 매병 고려 상감청자를 일본인 상인에게서 2만 원(당시 기와집 20채 값)에 구입하는 한 편, 참기름 병으로 쓰이던 조선 백자를 경매에서 만 오천 원에 낙찰받기도 한다.


겸재 정선의 '해악 전신첩'은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다. 거간 장형수는 그 집에서 불쏘시개 감이었던 화첩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당시 송병준의 자손에게 그 화첩을 사도 되는지 묻는다. “불쏘시개 감이었으니 장작 값이나 놓고 가시오.” 그렇게 해서 장형수는 당시 20원에 화첩을 구했고 전형필은 1500원을 치르고 정선의 화첩을 산다.


저자 이충렬은 겸재 정선의 화첩을 구한 후 전형필이 느꼈을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전형필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친일파의 후손이지만 그래도 글줄이나 읽었을 터인데, 조상이 남겨준 귀중한 옛책과 서화를 불쏘시개로 여기는 것은, 무식해서가 아니라 우리 문화 아니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1930년대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친일파는 계속 늘어났다. 심지어는 3.1 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까지 친일로 돌아서지 않았는가. 전형필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민족의 문화를 지키는 일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독립운동이라는 생각을 다잡았다.
- 이충렬 <간송 전형필> (p218)

또한 그는 훈민정음해례본을 만 원(중개인에게 천 원)을 들여 사서 비밀히 지키고 있다가 해방 후에 학자들에게 공개한다. 그 후 6.25 전쟁이 나자, 잠잘 때나 화장실 갈 때에도 훈민정음해례본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지킨다. 한글의 우수성을 해례본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니 그의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현재 간송 미술관에는 이렇게 그의 재산과 바꿔 지켜낸 다수의 국보와 보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또 만약 간송이 사서 고이 지켜 보존하지 않았다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가치를 알 수 없었을, 정선, 심사정, 김정희, 신윤복, 김득신 등 우리나라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는 죽었으나 그의 숨결은 그가 지켜낸 문화재들과 함께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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