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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ray Nov 17. 2020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질문을 바꾸면 달라지는 것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이것은 "사과가 좋아? 배가 좋아?"라는 아이들의 취향을 묻는 단순 선택 질문이 아니다.

질문 자체는 간단하지만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인생을 70년 정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인생을 아직 본격적으로 살지도 않은 출발선에 서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유아기 아이들이라면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의 경험과 지식으로만 이야기하기는 조금 버겁다. 아이들이 가진 지식과 생각, 경험을 통틀어 자신이 되고 싶은 '무엇'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중한 아이들은 차마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어떤 아이들은 단숨에 되고 싶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아이들의 생각은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기억하기 쉽지 않을 만큼 시시로 변한다. 이를 두고 변덕이 심하다든가 줏대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자기도 자신을 잘 모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묻는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이들은 자신이 사과나 배를 택하는 것처럼 인생의 무엇을 그냥 쉽게 선택하면 될 것으로 여길 것이다. 땅에 발을 딛고 살지 않는 아이들에게 '초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에 자라서 새나 물고기가 되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른의 입장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아이들의 생각을 자신이 가진 생각으로 유도하고 아이들에게 어떤 것을 미리 가르치려는 의도가 있을 수 있다. 어른들은 이미 '초현실이 현실'인 세계를 벗어나 땅에 발을 딛고 산 지 오래되었다. 만약 아이들이 아직 초현실 속에 있다면 아이들을 현실로 오게 하여 신발을 신겨 땅을 딛고 걸어가야 할 길을 정해주기 위해 위와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아이들이 유아기보다 조금 자라 초등학생이 되어도 아직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도 책이나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해보며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기가 어린 시절에 비해 쉬워진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오리무중일 수 있다. 만약 부모들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도록 전적으로 지원하는 경우에는 그래도 조금 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를 잘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이 고민할 시간을 줄 여유가 아직 있다.


중학생 정도 되면, 아이들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몰라도 나중에 찾으면 된다고 여유를 가지고 말해주곤 했던 어른들이 먼저 변한다. 아직도 하늘을 날고 초현실 속에 인생을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부모들은 내심 조바심이 난다. 이제 어느 정도 아이들이 갈 길을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과 아직 아무 갈피를 잡지 못한 아이들 사이에 문제도 종종 발생한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왜 우리 아이는 아직도 현실의 땅을 딛고 걷지 못하는 것일까 의아해한다. 이 시기 부모들과 아이들은 서로가 원하는 길이 다를 수 있다. 이런 경우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한 '밀고 당김'이 시작되기도 한다.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향한 애타는 목마름은 아이의 나머지 인생을 이끌 원동력이 된다. 아이는 그에게 필요한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대학의 문을 두드리거나 다양한 실업 전선에 뛰어들며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아 발돋움한다. 결국 아이들에게 그 '무엇'은 인생의 목표요 바라보고 달려야 할 이정표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평생 자신이 될 무언가를 향해 달려왔을 아이. 그 아이는 자신이 될 '무엇'을 꿈꾸는 사이 '어른'이 된다.


이때부터는 예전에 자신들에게 질문했던 어른들의 그 질문은 아이들 내면의 질문이 된다.

'내가 정말 그 무엇이 되었는가? 나는 이미 컸는데 만약 그것이 안 되었다면 나는 무엇인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신이 되어야 할 그 '무엇'에 두었다면 이런 질문들이 자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정말 자신이 되고자 했던 그 '무엇'이 된 것일까? 만약 그 '무엇'이 안된 경우는? 그리고 그 '무엇'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일까? '무엇'이 되고 싶어 열심히 노력했고 그것을 이루었다면? 만약 자신이 된 그 '무엇'이 자기 생각과 다른 '무엇'이라면?


결국 인생이란 어른들의 질문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생은 아이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것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내가 바라고 꿈꾸었던 그 무엇이 되었다고 만족할 수 없어 또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며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 또는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지만 만약 무언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로 인해 자괴감이나 허탈감 같은 감정으로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너는 자라 무엇이 되니?"


서 했던 질문은 내 인생에서 바라보아야 할 목표, 추구해야 할 방향성에 대한 질문이었다면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되돌아보게 하는데 질문의 초점이 있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내가 되어야 할 그 '무엇'에 주목하기 이전에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에 주목할 수 있도록 돕는다. 결국 내가 추구하는 그 '무엇'은 '내' 속에서 나와야 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해서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인식하도록 돕는 것은 아이들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한 아이들 스스로의 답이 없이는 내가 '무엇'인가가 되지 못했을 경우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어 아이들 인생에 크고 작은 혼란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나의 질문의 의도는 무엇일까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 아이는 자라 무엇이 되는가?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 '어른'이 된다. 물론 '어른'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른으로 인정하는 시점만 보면, 스무 살만 되면 '성년'이란 이름을 주고 '어른'이라 인정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로부터 청소년기를 거치며 살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시기의 인생의 과정을 순간순간 살아내는 것 자체가 어떤 자격증 시험을 치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기를  살아내기만 하면, 어떤 조건의 충족 여부와 상관없이 성년, 즉 '어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추구하며 애써 이루려고 했던 그 '무엇''어른'의 모습을 갖추기 위한 도구요 수단이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결국 사람의 사람됨, 인간의 인간됨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한 조건은 그저 오늘을 충실하게, 정직하게, 내가 가진 본연의 모습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라서 어른이 된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의무이고 또한 가장 신성한 그 '무엇'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 누구에게나 존중받고 누구든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할 수 있는 그 존재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가장 최종의 그 '무엇'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내가 정한 목표로서의 그 '무엇'이 되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가치 절하될 수 없는 고귀함이 있다.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언덕을 담담하게 오르내리다 보면 자신이 된 '어른'이라는 사람이 거울에 비추이고 그 어른된 그의 인간 본연의 모습에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다.


질문을 바꾸면 우리 아이들의 인생은 좀 더 빛날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자라 무엇이 되는지'에 대하여 답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유도해준다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충분히 가치있게 살았노라 여기는 '어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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