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필, 스페인 예술로 걷다] 중에서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는 나로서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거대한 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다리 사이로 사람이 지나다닐 공간이 있는 거대 거미 한 마리.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를 공격하러 오던 거미 생각에 몸서리 쳐질 듯 커다란 거미의 형상이 미술관 전경에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은 너무나 평화롭게 보인다. 그런데 찬찬히 그것을 보다 보면 그를 피해 달아나고 싶다기보다 오히려 다리에 매달리고 그 사이를 오가며 장난을 치고 싶어 진다.
이처럼 혐오스러운 감정의 동요가 그치고 거미를 친근하게 대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작가가 만든 작품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마망을 만든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는 프랑스 출신 미국 조각가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불륜을 알면서도 가정을 지키고자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며 견뎌냈던 엄마를 작품에 담아냈다. 엄마가 했던 일은 태피스트리. 엄마는 일을 하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던 삶의 무게를 그 실과 함께 자아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거미 다리 아래쪽에서 위를 바라보면 거미의 배에 수많은 알들이 붙어 있다. 거미가 자신의 알들을 보호하며 실을 자아내듯 자신의 엄마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속 격동을 실과 함께 날려 버리고 묵묵히 가정을 보호한 것을 알았던 부르주아에게 거미는 자신의 엄마를 보여주는 은유이다.
부르주아 작품의 배경 설명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모든 기어 다니는 것들을 극혐 하는 나에게도 여유롭게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엄마. 그 작품의 이름 하나만으로도 훌륭하다. 그냥 그 이름만으로도 알을 품고 있는 거미에 대한 애처로움과 딱함이 몰려 오지만 거기에 작가의 배경 이야기가 더해지면 작품을 이해하는 폭이 배가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그 사건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은 작가의 삶의 배경 이야기가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게 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녀의 부르주아라는 특이한 이름과 달리 평범한 작품의 이름, 엄마. 그러나 브르주아의 이야기를 알게 된 이후 ‘엄마’라는 작품의 이름은 애수를 자아내는 독창적인 고유명사로 불릴 자격을 얻게 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서로 간의 이야기가 얼마나 공유되었는가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사람이든 작품이든 알면 알수록 이해와 공감의 폭과 깊이는 넓어지고 깊어진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더 많은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이다. 더 이해하고 더 공감하기 위한 몸부림.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 부르주아는 내가 글을 읽어야 할 이유를 다시금 새롭게 해 주었다.
스페인에 간다면 루이스 브르주아의 작품을 보러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러 그 마망의 애처로운 다리 어딘가에서 사진 한 장 남기고 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