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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꾸신발 Dec 06. 2022

03. 우울증이 먼저인가 술이 먼저인가

비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투병기

  술을 오래도 마셨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을 따라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벌써 '취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의과대학에서도, 병원에서도,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많이도 가졌다. 술을 마셨을 때의 안락한 느낌, 긴장이 풀어지고 늘어지면서 즐거워지는 기분을 좋아했다.


 전공의 시절, 야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자취방으로 퇴근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길거리에서 파는 순대와 튀김이 맛있어 보였고, 맥주를 함께 사서 들어갔다. 그때가 혼술의 시작이었다. 모임이 있어야만 마시던 술의 섭취량은 혼술을 시작하면서 급격히 늘어났다. 이제는 10년 정도 지나 그때의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주로는 맥주를 마셨다.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는 '카스 레드'라는, 6도 내외의 알코올 도수를 가지는 맥주가 있었다. 맛은 소맥과 비슷했고, 당연히 취기가 빨리 돌아서 자주 마시곤 했다. 요즘은 국산 맥주도 다양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마트에서 여러 가지 수입 맥주를 사다가 비교해 보면서 마시기도 했다.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8주간의 군의관 훈련을 받았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이래, 그 8주가 가장 긴 금주 기간이었다. 훈련소에 들어간 첫 주는 너무나 힘들었다. 날씨는 춥고, 체력은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바닥나 있었고, 일과는 생각보다 바쁘게 돌아갔다. 뭐야, 군의관 가면 누가 편하다고 그랬지.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했다. 지금은 어쩌면 그때 느꼈던 힘듬이, 단순히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술을 마시다가 마시지 않아서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2월 말에 시작된 훈련은 4월 말까지 진행되었다.


 4월이 되자 날씨도 따뜻해졌고, 일과 잠으로만 보내던 몸에 체력이라는 것도 약간 생겨났다. 몸무게도 7-8kg 정도 빠졌다. 앞으로 어디로 배치될 지도 정해졌다. 그 안에서 내가 걱정할 것이란 더 이상 없었다. 일도, 논문도, 인간관계도, 미래도, 모든 것이. 그러자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이 찾아왔다. 그때 잠시 느꼈던 해방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비록 몸은 자유롭지 않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편안했다.


 그리고 군의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는 결혼을 해서 가정이 있었고 와이프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내가 술 마시는 것을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11시 반에 시작했던 군대의 점심시간은, 퇴근 시간이 되자 허기를 극대화시켰고, 집에 도착하면 술을 마시기에 최적화된 몸이 되어 있었다. 그때 얼마나 자주 술을 마셨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일주일에 최소 세네번은 술을 마셨던 것 같다. 3년의 군의관 생활이 끝나고 사회로 돌아와서도 술을 마시는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와인의 다양함을 알게 되었고, 술 마시는 일이 질리지가 않았다. 보통은 와인 반 병에 맥주 한두 캔이 나의 평균 하루 섭취량이었다. 더 많은 날도 많았지만, 적은 날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데일리 드링커로 4년을 살자 드디어 우울감이 찾아왔고, 5년이 지나자 우울증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우울증 치료를 받으면서도 술이 주는 안락한 느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7년여를 나는 술을 마시면서 보냈다.


 그리고 열흘 전, 나는 우울증 약을 많이 줄여가고 있다 우연한 계기로 열흘간 약을 끊게 되었다. 체내에서 약이 사라지자 잊고 있었던 우울증이 다시 올라왔다. 한참 동안 약을 먹으면서 이제 다 나은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더 이상 나의 몸을, 나의 마음을, 약만 믿고 방치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술을 끊었다.



 술과 우울증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가진다. 우울할 때 술을 마시면 기분이 다소 나아진다. 그래서 많은 기분장애 환자들이 정상인보다 술을 많이 마신다. 또 알코올 자체가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자의 20%가 주요우울장애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술은 뇌의 보상 회로 체계를 망가트려 우울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논문과 책에 의하면 중독은 뇌의 도파민 체계에 작용한다. 도파민은 뇌에 존재하는 신경전달 물질로 인간이 살아갈 의욕과 흥미를 부여하는데 관여한다. 술은 지속적으로 도파민을 분비하게 만들고, 우리 몸에 도파민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 뇌는 도파민은 받아들이는 수용체를 서서히 줄여버린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은 일종의 도파민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다시 술을 마시게 된다. 그러면 또 도파민 수용체가 줄어들고, 술을 또 마시고, 악순환이 계속되다 보면 중독의 회로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의 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중독의 회로를 끊어낼 수만 있다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논문에서는 6-12주가 지나면 뇌의 도파민 수용체가 다시 정상으로 회복된다고 되어 있었다. 물론 이는 만성적으로 술을 마신 기간과 음주량에도 영향을 받고, 개개인의 차이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오늘도 크게 티는 나지 않지만, 나의 뇌는 정상을 향해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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