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의 예술 The art of diagnosis
현대 의학을 진단의 예술이라고도 합니다.
체액설이나 4원소설 같이 철학적인 접근으로 질병을 구분하고 정의하던 중세 의학 이후, 수많은 부검과 현미경 검사, 실험실 연구를 통해 질병을 객관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먼 옛날부터 학질(서양에서는 말라리아)라고 불리던 심한 발열 질환을 적혈구에 내 기생충이 일으킨다는 것을 현미경으로 밝혀낸 경우처럼요.
질병을 객관적인 사실 - 영상, 현미경검사, 혈액검사 - 로써 구분한다는 개념은 중세 의학과 현대 의학을 나누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충분한 기술을 가졌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실제 대다수의 병원에서는 혈액검사와 현미경 검사, 실험실 검사를 의사가 아닌 검사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임상병리사가 시행하고 있지요.
말라리아가 적혈구 내 기생충을 확인함으로써 진단되고, 적혈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임상병리사의 일이라면, 대체 의사는 어디서 뭘 하는 것일까요? 결핵은 결핵균을 확인하여 진단하고 피부암은 피부조직검사를 통해 진단한다면 대체 진단의 예술과 같이 거창한 말은 왜 쓰고 있을까요? 있어보이려고?
의사가 하는 일은 마지막에 언급하기로 하고, 검사만으로 질병을 찾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에이즈로 널리 알려진 HIV 검사에 대해 잠시 얘기해 보겠습니다.
HIV 항체검사로 보는 의학검사의 함정
에이즈 AIDS는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의 약자입니다. 직역하면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이라고 불립니다. 태어날 당시에는 정상이던 면역이 특정 원인에 의해 저하되는 질환이라는 뜻인데, 이 질환의 원인이 바로 그 유명한 HIV라는 바이러스입니다.
에이즈에 대한 설명을 더 하고 싶지만, 주제에 집중하여 정리해보겠습니다. 에이즈는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면역 저하 질환이고, 진단 방법은 원인 바이러스인 HIV가 사람 혈액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진 어렵지 않죠?
에이즈를 진단하는 HIV 검사는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이러스를 직접 분리하여 HIV 유전체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직접 확인이 필요하므로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검사 비용이 비쌉니다. 또 다른 방법은 우리 몸이 HIV에 감염되었을 때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항체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항체는 항원에 반응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미리 HIV 특이항원을 제조하여 만들어두면, 의심환자의 혈액을 섞어 보는 것 만으로 확인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쉽고 저렴하며 빠른 확인이 가능하죠.
비록 에이즈의 확정진단은 HIV 바이러스를 직접 분리해야만 가능하지만, 쉽고 저렴한 HIV 항체검사도 매우 정확한 편입니다. 어느 정도로 정확하냐면, 에이즈 환자에게 HIV 항체검사를 시행하면, 99.7%가 양성으로 판정됩니다. 즉 1,000명의 에이즈 환자 중에 997명은 HIV 항체검사로써 진단이 가능하고 단지 3명만이 HIV 항체검사에서 진단을 놓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검사들과 비교하면 매우 훌륭한 정확도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상인이지만 우연히 HIV 항체와 너무 비슷한 항체가 만들어지는 바람에 HIV 항체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확률은 0.8% 정도로, 1,000명의 에이즈가 아닌 건강인 중에 8명 정도는 우연히 HIV 항체검사에서 양성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는 뜻이지요. 이 8명은 결국 바이러스 확진검사로써 에이즈가 아님이 증명되겠지만, 그때까지는 불안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아래 표는 에이즈 환자 1,000명과 건강한 사람 1,000명을 대상으로 HIV 항체검사 양성여부를 표로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에이즈 환자 1,000명 중에서는 3명만이 검사가 잘못 나오고, 건강인 1,000명 중에 8명도 잘못 결과가 나옵니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99% 이상의 정확도를 보이며, 최종 진단은 바이러스를 확인하면 되기 때문에 HIV 항체검사 결과를 믿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표를 주의 깊게 보면, 실제 상황과는 매우 동떨어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눈치채셨나요?
바로 에이즈에 걸린 환자가 1,000명, 에이즈가 없는 건강인도 1,000명이라는 점입니다. 상식적으로 에이즈에 걸린 환자가 50%나 될 리가 없습니다. 이게 왜 문제냐면, 에이즈 환자냐 아니냐는 HIV 항체검사 이후에 확진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진단이고, 보건소와 병원에서는 그걸 모르니까 HIV 항체검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실제로 HIV 항체검사를 받는 사람은 대부분 건강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 0.03%만이 에이즈 환자이기 때문에, 아무나 붙잡고 시행하는 HIV 항체검사의 실제 분포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검사의 정확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1,000명의 에이즈 환자는 여전히 99.7%의 확률로 HIV 항체검사에서 정확히 진단되고, 건강인을 HIV 감염으로 오진할 확률도 0.8%로 동일합니다. 다른 점은 건강인이 3백만 명으로 증가한 것뿐이지요.
그럼 이 표를 보고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HIV에 감염되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 HIV 항체검사를 받았는데 양성으로 에이즈 의심 소견이 나와버렸습니다. 이 경우 여러분이 확진검사를 통해 실제 에이즈로 진단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4%입니다. HIV 항체검사 양성이 나오는 모든 경우는 에이즈에 걸려서 항체검사 양성이 나온 997명에 건강하지만 오진으로 항체검사 양성이 나온 24,000명을 합한 총 24,997명이 됩니다. 즉 일반인 3,001,000명을 검사하면 양성이 모두 24,997명에서 나온다는 것이지요. 이중 진짜 에이즈 환자는 997명/24,997명 = 약 4%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3백만 명 중 운나쁘게 HIV 항체검사 양성이 나온 24,997명에 해당하더라도, 실제 질병이 있을 가능성은 4%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검사의 정확도는 여전히 99%이고요.
정확한 검사만으로는 질병을 찾을 수 없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질병을 찾아내야 할까요. 더 정확한 검사를 만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HIV 바이러스를 직접 잡아낼 수 있는 100% 확실한 검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정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바로 윗 표에서 검사 대상이었던 총 인원 3백만 명을 줄이는 것입니다. 검사 전에 미리 건강인을 최대한 줄여 3백만 명을 천명으로 줄이면, 오진 환자의 수가 24,000 + 3명에서 8 + 3명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물론, 너무 많이 줄이다가 검사해야 할 에이즈 환자를 놓치면 큰일 나겠죠.
그렇다면 검사할 대상은 어떻게 줄일까요? 여기서 의사가 필요합니다. 에이즈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의사는 검사 없이 나이, 성별, 문진과 같은 대화만으로도 질병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을 걸러낼 수 있습니다. 조금 살을 붙이면 "보면 안다"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HIV 감염 가능성이 떨어지니 제외, 성생활을 하지만 안전하게 하고 있으면 역시 제외, 이런 식으로 3백만 명을 수만, 수천 명까지 줄일 수가 있습니다. 사전에 충분히 거르는 작업을 통해 정말 에이즈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검사를 시행한다면, 맨 처음 표와 같이 최소한의 오진율만으로 진단을 해낼 수 있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잃어버렸다고 비유해보겠습니다. 바늘을 찾기 위해서는 무작정 강력한 자석을 들고 온 모래사장을 헤집는 게 능사가 아닙니다. 아이에게 충분히 묻고 추측하여 바늘을 떨어뜨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한정시켜야 더 약한 자석으로, 아니 충분히 추정을 잘 했다면 맨눈만으로도 떨어뜨린 바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에게 물어보는 과정이 바로 의사가 하는 일입니다.
의사가 하는 일
1982년 의학계의 유명한 논문이 출판됩니다. 제목은 바로 The Art of Diagnosis, 진단의 예술. 제목에서 풍기는 심미학적인 느낌과는 다르게, 임상 의사들의 진단 과정을 관찰/분석하여 의사가 한 질병을 어떻게 진단하는지를 밝힌 심리사회학 연구 논문입니다.
연구자들은 1970년대 임상진단 콘퍼런스 50례를 대상으로 의사들과 의과대학 학생들이 진단을 어떻게 해내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연구 대상(의사들과 학생들)의 진단 과정을 단계별로 나누었고 각 단계별로 왜 그렇게 판단하였는지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진단 과정에서 의사들은 비슷한 사고 양상을 보였습니다. 패턴 분석을 통한 추정진단 떠올리기, 사전 정보와 병리 소견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중심 소견 key pivot을 골라내는 과정, 의학적 지식을 통한 추정진단의 정교화, 진단 확정 이후 한번 더 확인하는 과정 등 곳곳에서 공통된 사고 양식이 관찰됐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를 볼 때 주어진 정보들에서 특정한 패턴을 찾아냅니다. 호소하는 증상, 환자의 특성과 기본 검사 결과들에서 자신의 사전 지식에 맞는 유의미한 패턴들을 찾는 것이지요. 그다음은 패턴을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 중심 소견을 근간으로 그동안 모은 정보를 배열하고, 곁가지 소견은 버리면서 하나의 스토리를 머릿속에 짜는 것이지요. 그다음은 추정진단 목록을 만드는 것입니다. 추정진단은 이후 하나씩 꺼내지면서 맞는지 확인되는데, 이 결과에 따라 진단 목록에서 배제 rule-out 되기도, 진입 rule-in 되기도 합니다. 진단 목록이 만들어지면, 의사는 필요한 추가 검사나 정보를 더 모아서 다시 진단 확률을 계산하고, 최종적으로는 확정 진단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의사의 상상력과 무의식적인 확률 계산이 겹겹이 쌓여가는 일련의 진단적 추론 diagnostic reasoning과정을 진단의 예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금 오글거리기도 하고 조금은 비과학적인 표현이지만, 수련시절 경험 많은 교수님들의 오묘한 진단과정을 떠올려보면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회진을 휘리릭 돌고 나서는 추정 진단을 자판기마냥 내놓곤 하셨거든요.
맺음말
글 말미를 빌어 조금 변명을 하겠습니다.
먼저, 용어 정의입니다. 사실 에이즈와 HIV 바이러스 감염은 같지 않습니다. 길게 예를 들어 설명한 HIV 항체검사 정확도 이야기에서 지속적으로 에이즈 환자 / 건강인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정확한 표현은 HIV 감염자 / HIV 비감염자입니다. 우리가 에이즈라고 부르는 질병은 HIV 바이러스가 충분히 몸에서 세를 키워 백혈구를 모두 죽인 뒤에 발생하는 면역 결핍 상황을 말하는 것이고, HIV 검사들로 진단 가능한 질병은 그보다 훨씬 경하면서 전파도 적게 되는 HIV 감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러 널리 알려진 질병명을 사용하였으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교정을 거듭하다 내린 결정임에도 에이즈에 대한 오해를 생각하면 걱정이 먼저 앞섭니다.
또한 검사 정확도라는 표현도 의학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검사에서 양성이지만 확정진단이 되지 않은 경우나 질병은 있지만 검사에서는 잡히지 않고 놓친 경우, 모두 정확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의학에서는 위양성률과 위음성률이라는 고유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검사 결과에 따라 질병을 예측하지 못한, 제가 오진율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한 개념도 양성예측률과 음성예측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의학에서는 "검사가 정확하다"라는 말 대신 "위양성률이 낮다" 또는 "양성예측률이 높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읽어볼 만한 자료로는 [통계의 함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의학에 국한되지 않고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통계 뒷 사정을 읽기 쉽게 예를 들며 설명해줍니다. 덧붙여 혹시 베이즈 이론 Bayer's theory를 들어보신 적이 있다면 베이즈 이론이 의학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최근 각광받는 베이지안 통계가 의학에서는 고전적인 개념임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의학도라면, 1982년 NEJM에 게재된 [The Art of Diagnosis] 논문 전문을 추천드립니다.
쓰고 나니 의사의 입장과 관점이 조금 많이 들어간 것 같아 전달이 잘 될지 걱정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