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보니 세례를 받았다. 이름과 똑같은 세례명이 생겼다. 나의 이름은 '석문'이고 세례명도 '석문'이다. 외국 성인의 이름을 딴 대부분의 세례명과는 다르게 한국 순교 성인의 이름으로 지어졌다. 그 때문에 매번 사람들에게 세례명의 유래에 관한 설명을 되풀이해야 했고 번거로웠다. 그럴 리 없다며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굳이 '석문'이라는 세례명 뒤에 '가롤로'라는 외국 성인의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 세례명을 믿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게 카톨릭 신자로 삶을 시작했다. 조부모님을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성당은 내게 그저 놀이터였고 토요일마다 열리는 주일학교보다는 오후의 프로야구 중계가 더 좋았다.
사람들의 북적거림에 지쳐가던 시기였다. 성당이 부대 안에 있었고 아무도 없을 만한 시간에 혼자 가곤 했다. 그리고 피아노가 있었다. 햇빛은 오색의 빛깔로 변모해 성당 안에 눈부시게 내리쳤고 서로 어우러져 마치 빛의 안개가 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작은 소리도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곤 했기에 피아노 소리는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무엇보다 고요했다. 침묵의 그 순간, 오직 내 곁에는 빛과 피아노 소리만이 있었다. 차가운 유리 같던 건반은 포근했고 그 위에서 서투르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때때로 유려해 보이기도 했다. 놀이터로 삼아 놀던 공간은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을 주었다.
지금은 오후의 프로야구도 좋아하지 않고 그 이후로 더는 성당을 가지도 않는다. 어쩌다 여행 중에 들른 성당 안에서 내게 잠시나마 여유를 내어줬던 지난 기억 속의 그곳을 떠올렸다. 그러나 스테인드글라스의 반짝거림도 고요한 침묵의 공기도 그때와 비슷하지만 달랐다. 다시는 그 안온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신을 믿지 않지만, 때때로 내게 이름을 남겨준 그 옛날의 순교 성인을 생각해 본다.
커버 이미지: 에드워드 호퍼, <주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