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각 김밥을 들고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천 원짜리 참치 마요네즈가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인 천팔백 원짜리 삼각김밥세트가 있었다. 아무거나 고르기엔 효용과 기회비용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기에 함부로 고를 수 없었다. 참치 마요네즈를 선택하면 천백 원짜리 컵라면을 살 기회가 생기는데 문제는 비용이 더 든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족은 삼각김밥세트 한 개보다는 클 것이 분명했다. 삼천 원안에서 나는 가능한 가장 큰 행복을 느껴야 했다. 이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찰나, 시야에 낯선 팔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분홍색 히잡을 쓰고 있었고 연두색 비닐로 포장된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영어로 '포크'가 들리는 문장을 말했는데 너무 작게 말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못 알아들은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녀는 히잡을 썼고 샌드위치를 들었으며 '포크'라는 단어를 썼다.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 봤다. 여기는 대학교 안에 있는 편의점이고 그녀는 나보다 피부색이 어둡고 히잡을 썼으며 한국말이 서툰지 영어로 말했다.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 상식적으로 그녀의 말을 풀어보자면 "나는 외국인 유학생이라 한국어가 서툰데, 여기 이 가공된 샌드위치에 혹시 돼지고기가 들어있나요"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는 좀 전까지 고심하던 삼각 김밥 난제를 까맣게 잊은 채 그녀가 내민 샌드위치의 성분 표기란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샌드위치에 이렇게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그녀는 나보다 키가 한참 작았고 가을용 짙은 베이지색 재킷을 입었다. 통통한 편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는데 그 안의 두 눈은 나를 보며 불안한 듯 깜박거렸다. 왼 팔은 그녀의 상체를 둘러 감싸 안고 있었다. 나는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미생물 연구원처럼 가능한 신중하고 능숙한 몸짓을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참을 봐도 돼지고기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작게 한숨을 몰아쉬고 "노 포크"라고 말하며 샌드위치를 돌려주었다. 굳이 "치킨"이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그 샌드위치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며 분명 "땡큐"라고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녀가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문을 나설 때까지 제자리에서 지켜보았다. 나는 그녀가 떠나고 나서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했다. 그녀는 분명 백인도 흑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슬람교도라고 하기엔 공평하지 않았다. 나 역시 가톨릭교도 였지만 누가 나를 가톨릭교도라고 부른다거나 규정짓는 다면 기분이 썩 좋진 않으니까. 국적도 알 수 없고 확실치 않기에 아시아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히잡을 쓰고 샌드위치를 내밀며 불안한 눈빛으로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여성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그리곤 참치 마요네즈 삼각 김밥과 컵 라면을 사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지나가고 난 문에는 편의점 파트타임을 구하는 A4용지가 붙어있었다. 뜨거운 물을 컵라면에 붓고 기다리는 삼 분 삼십 초 동안 또 다른 고민을 했다.
나는 전역 후에 바로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일 년 동안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전역 후에 느끼는 신비로운 호기와 자신감이 충만할 때였다. 아버지는 기왕이면 행정고시가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는 자신의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중간만 하는 게 가장 좋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5급과 9급 사이 바로 정확히 중간인 7급이었다. 시험 결과는 곧장 복학으로 이어졌다. 중간도 무척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제 분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분수를 챙겨 깔끔히 1년 만에 포기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도망간 건지도 모른다.
구인 모집을 보고 연락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알바 면접을 오라고 연락이 왔다. 너무 충동적으로 결정한 건 아닌지 조금의 후회를 뒤로 하고 인문관 지하 1층에 있는 편의점으로 내려갔다. 편의점 점주는 알바가 구해지지 않아 고심하던 중에 학생이 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처음에 그 이유를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눈빛은 어쩐지 음흉했다.
알바시간은 오전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였다. 점심시간의 대학교 편의점은 거의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편의점 상품들은 채워 놓으면 누군가 몽땅 훔쳐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는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었다. 계속 채우면 계속 가져갔고 그러면 나는 또 채워야 했다. 어쩐지 억울했다. 이럴 거면 내가 뭐하러 있나 싶었다. 차라리 돈은 양심껏 내게 하고 물건은 알아서 가져가게 하는 편이 효율적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애꿎은 바코드 스캐너만 소심하게 내려치며 나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하던 엄마의 말은 역시 다시 한번 옳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입증하기 어려운 논리라 그런지도 모른다. 대학 입시에다 미쳐버린 사립대학교 학비도 모자라 공무원 시험을 일 년간 지원해 주신 부모님에게 양심적으로 죄송했기에 어쨌든 알바를 계속했다.
그는 정확히 5시 5분쯤 들어오곤 했다. 두 학번 위인 경영학과 학생이었는데 이상하리만치 거의 정확하게 5분 정도 늦게 왔다. 보통 교대를 하면 조금 미리 와서 기다리게 마련인 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경영학과 학생에 대한 아주 나쁜 편견이 생길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점심시간을 피해 저녁 타임에 일하는 건 우연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는 큰 키에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얼굴과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누구라도 다가가 말 걸어 보고 싶은 기분 좋은 아우라를 가졌다. 조금 부러웠다.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 올 때 특히 해맑게 웃으며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차라리 웃지나 말지 이제는 익숙한 광고처럼 거슬리지도 않았다.
알바가 끝나고 인문관 1층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한 층 밖에 되지 않아 계단으로 걸어도 충분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인문관 1층 안 쪽에는 넓은 회랑 같은 공간이 있었다. 1층인데도 그 공간은 번잡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거나 공부하는 곳으로 이용됐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아무 자리 나 가서 앉았다.
그녀는 중간 정도 오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졌다. 청바지에 단조로운 디자인이 들어간 도톰한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티셔츠는 상당히 컸고 어깨가 앞으로 조금 말려 있어 그런지 몸집이 훨씬 작아 보였다. 그녀는 어깨에 투박해 보이는 회색 크로스 백을 메고 학교 로고가 새겨진 파일을 양 팔로 감싸 안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너무 조심스러워 처음에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온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주 유창한 영어로 말했는데 마치 토익 파트 2에 나오는 의문문 문장 같았다. 표정은 침착하고 정중해 보이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역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할 때 "나는 외국인 유학생이고 연구에 필요한 설문 조사를 하고 있다. 도와주면 몹시 감사하겠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잠시 안도의 미소가 스치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설문지와 펜을 주곤 멈칫하더니 막대 사탕을 크로스 백에서 꺼내 주었다. 그녀는 옆 테이블의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접근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설문지에 답을 달기 시작했다. 포도 맛이었다.
설문지는 역시나 모두 영어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단 한 글자도 예외가 없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은 채 영어 독해 테스트를 보는 것처럼 머리를 싸매고 최대한 성실히 응답했다. 나는 막대사탕을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설문지는 내용이 꽤 길었고 모두 응답하는데 대략 십 오분 정도 걸렸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선한 본성을 발휘한 일을 스스로 칭찬해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훌륭한 표본이 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었고, 설문지와 펜을 챙겨 "땡큐"를 남긴 채 옆 테이블로 옮겨갔다. 설문지를 회수하러 다니는 그녀의 말린 어깨가 뒷모습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나는 아침 첫 수업인 '국어의 이해' 수업을 들으러 인문관 607호 강의실에 갔다. 그곳에서 '국어'와 '국문'의 차이를 이해했다. 소설이 좋아 신청한 교양 강좌였는데 '국어의 이해'에 소설은 없었다. 대신 '용언', '체언', '조사', '어미' 등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스타벅스 벤티 사이즈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왔다. 그 모습은 평범하면서도 낯설었다. 그의 키는 스타벅스 벤티 사이즈만큼이나 컸고 가냘플 정도로 말랐다. 체크무늬 셔츠에 무채색 계열의 면바지를 주로 입고 알이 굵은 안경을 썼는데 젊은 교수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그의 국적은 알지 못하지만 한국, 중국, 일본인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어느 날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스타벅스 벤티가 마스코트처럼 따라다녔다. 나는 이상한 상상이지만 어쩌면 저 잔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열어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조금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알아듣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국어의 이해' 책을 펼치더니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궁금한 게 있는데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153페이지를 펴서 명사를 어근으로 하는 접두파생법과 형용사나 동사를 어근으로 하는 접두파생법의 원리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어가 참 어렵다며 머쓱하게 웃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때보다 더 집중하여 재빨리 153페이지를 읽어 봤지만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가능한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 그는 내 어깨를 산뜻하게 두드리더니 마치 이해한다는 깊은 눈빛으로 미소 지었다. 그리곤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여유로운 손놀림으로 스타벅스 벤티 잔의 뚜껑을 열었다. 뽀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어김없이 지하 1층 편의점으로 향했다. 광풍 같던 점심시간이 지나고 곧 평화가 찾아왔다. 어느덧 세 시를 넘어 시계가 네 시를 향해 가던 때 덩치가 크고 피부가 매우 어두운 남자가 편의점 문을 열었다. 그는 흑인이었다. 통이 넓은 청바지와 하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갈색 가죽 벨트의 은색 버클이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사각의 검은색 백팩은 그의 등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음료수 코너를 향해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 콜라 한 캔을 꺼냈다. 후드 티에 가려진 그의 팔뚝이 상당히 두꺼워 보였다. 그의 체구에 비해 콜라 캔이 너무 작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인스턴트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한 봉지만 들었는데 어딘지 부족해 보였다. 그는 계산대에 서 있는 내게 아까보다 더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계속 쓸어냈다. 그가 혹시라도 말을 걸 때에 대비해 작은 소리에도 집중했다. 이번에는 정확하게 들어야 했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콜라와 햄버거를 내려놓더니 체크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어느 때보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스캐너를 움켜쥐고 바코드를 찍었다. 날카로운 기계음이 두 번 반복해서 울렸다.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담아주시면 안 돼요?"
완벽한 한국어였다. 억양도 정확했다. 나는 나처럼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는 더 재빨리 비닐봉지를 꺼내 작아 보이던 콜라 캔과 햄버거를 담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바로 뒤돌아 가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카드 주셔야죠"
나는 그에게 체크카드를 건넸다. 그는 천천히 편의점 반대편 문으로 걸어 나갔다. 등에 매달린 백팩이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손에 쥔 바코드 스캐너는 다음 상품을 기다리며 붉은빛을 깜박였다.
커버 이미지 : 장미셸 바스키아, <할리우드 아프리칸>,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