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에는 밥이 문제다.
당연히 혼자 해먹는건 힘들고
혼자 차려먹다가 뭘 깨뜨리거나 뭘 못찾아먹을 것 같고
해놓고 가면 겨울에는 차가워지거나 여름에는 상할까봐
혼자 먹으면 외로울까봐...
걱정이 태산이라는 말이 딱이다.
일때문에 나가는 일정은 어쩔 수 없이 가는데
점심 때문에 친구들과 약속은 아예 잡지도 않는다.
친구들을 만나는 건 힐링하러 가는 건데
아침부터 소풍날처럼 (집에서 먹을)도시락을 싸느라
너무 진빠져서 나가기도 전에 지친다.
준비도 제대로 못하고 헐레벌떡 나가니
나가도 나가는 기분이 아니라서 나갈 욕구가 사라진다.
어쨌거나
이번에도 점심시간에 걸친 일정을 두고 그게 고민이었다.
아침부터, 아니 전날 저녁인가?
아마 2~3일전에도 물었을거다.
"엄마 없는데 뭐 해놓고 나갈까? 아님 뭘 사다놓을까? 밥시간에 배달을 시켜줄까?"
몇번이나 요리조리 물었다.
(11살쯤 됐으면 스스로 사다먹는 식으로 해결할 수 없나 싶겠지만
집주변에 먹을만한 곳은 순대국집, 카페, 돈까스집이 전부라
애혼자 가서 먹기가 애매하다.
김밥 한 줄 사올 분식집이 없다는 말이다.)
애는 뜨뜨미지근하게 얼버무리더니
결국 먹고 싶은게 없댄다.
그것도 이제 정말 나갈 준비를 해야하는 시점에.
애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이제 준비하거나 사다주려면 시간이 없는데
저러니까 배째라는 건가 싶었다.
어금니에 잔뜩 힘을 줘서 욱하는 마음을 누르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굶을꺼야? 혹시 엄마가 나가는 게 싫어서 그러는거야?"
애가 요리 레시피가 적힌 만화책을 들고 와서 하울정식이 먹고 싶댄다.
계란 후라이와 베이컨. 간단한 아침메뉴 느낌인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와서 그렇게 부른다.
집에 계란, 베이컨 둘다 없었다.
금요일이라 냉장고가 텅텅 빈 상태였다.
자기가 사다가 해먹으면 안되냐고
가스불도 조심하고 엄마가 하는 거 많이 봐서
할 수 있다는데 눈빛이 진심이라 마음이 움직였다.
빈 집에서 혼자 애가 뭘 해먹는다니
뭔가 애 혼자 내버려두고 내 볼 일 보는 것 같아
자꾸 미루던 일이다.
"그래 그럼 해봐. 계란은 한 판 들고 오다 깨뜨리면 아까우니까 10개나 20개 아무튼 좀 적게 들은 걸로 사."
그렇게 애한테 카드 한 장 주고 나갔다.
베이컨 7000원
계란 5000원
총 12000원
가스불 켜는 걸 다시 물어보는 전화를 한 번 하더니
완성해서 먹는 중이라며 평소에는 절대 안하는 영상전화를 했다.
그럴듯 하게 차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까지 틀어놓고.
딸이 스스로 만든 하울정식. 그리고 콤부차. 테이블세팅까지. #뉘집딸인지 최고다.
만 10살 인생에, 가장 행복해보이는 표정이었다.
아이는 그 순간을 나와 공유하고 싶었다보다.
두고두고 할머니가 되서도 기억하고 싶은 표정이다.
아.영상전화 장면을 캡쳐해둘껄.
일하던 중이라 거기까지 생각못했다.
별로 안 어렵던데?
엄마보다 후라이가 더 이쁘게 되서 깜짝 놀랐다니까?
베이컨을 구울 때 기름이 살짝 튀어서 아팠는데
찬물에 바로 씻어서 지금은 괜찮아 .
저녁 내내 점심의 그 하울 정식 이야기를 하는 딸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딸을 너무 못믿었나?
아이는 입맛이 없던 게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 딸은 혼자라도 제대로 차려먹으면서
그 시간의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멋지다.
엄마 이제 지영이를 믿고 일 할 수 있겠는데?
딸이 아까 낮에 영상통화로 보여줬던
그 으쓱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우리 딸은 다음 날 토요일 저녁 메뉴로
계란베이컨볶음밥을 만들어 엄마아빠에게 대접하고
바로 그 다음주 월요일에
연어초밥을 단촛물까지 직접 만들어
또 혼자서 점심을 해먹었고,
수요일에는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배가 고프다니까
하울정식 2인분을 뚝딱 만들어줬다.
나, 이제 주방일 놔도 되나?
행복한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