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의 교감
다시 공방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라는 단어가 붙는 까닭은 2년 전에 도자기 핸드 빌딩 수업을 3개월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도자기의 꽃은 물레지요. 당시 핸드 빌딩 과정을 마치고 물레를 막 차려고 하는 순간 여러 일이 겹쳤고, 그렇게 저는 도예 수업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시 정지 버튼은 2년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 눌리기도 하더라고요. 그렇게 타짜 속 김혜수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나 물레 차는 여자야!’라고 말할 수 있는 몸이 되긴 했는데요.
그러나 다시 재생 버튼을 너무나 느지막이 누른 탓인지 —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 흑흑 — 아니면 제 손이 똥손이라 그런 건지 물레를 차며 흙을 매만지는 건 기분은 좋으면서도 어렵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의 힘의 균형이 조금만 어그러지면 흙의 중심도 쉽게 덧납니다. 예쁜 원통형의 모양이 나와야 뭐든 시작할 수 있는데, 제가 만지작거리다 보면 나선형의 피사의 사탑이 탄생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다시 또 어그러뜨려 뭉툭하게 만들고, 물레를 차며 곧게 세우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일의 반복입니다.
맞습니다. 잘 못합니다. 선생님은 이런 저를 격려하십니다. 들인 시간에 비하자면 잘하고 있다며 당근을 자꾸만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도 이제 그리 순순한 인간은 아닌지라 아닌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기물을 만드는데 실패했거든요. 요거트 볼을 만들려고 시작했는데 끝에는 기묘한 항아리도 화병도 아닌 무언가가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두루미쯤 된다면 요거트를 담아 먹을 수 있을 텐데 일단 저는 두루미가 아니라서요….
다만 기물이 되지 못한 흙을 잘라 단면을 두루 살폈습니다. 두루미용 요거트 볼을 사람용 요거트 볼로 탈바꿈하려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더 편평한 바닥과 일정한 굵기의 둘레를 내려고 애를 써야겠더라고요.
뭘 보완하면 좋을지를 알고 모르고는 하늘과 땅 차이 아니겠어요. 기물을 완성하지 못했대도 다음에 더 좋은 요거트 볼을 만들 기회를 남겨놓은 셈이니,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봅니다.
사실은 기물은커녕 흙을 고르게 가지고 올려내기도 벅찬 게 저의 오늘입니다. 반면에 선생님이 시연하실 때면 흙은 손끝에서 우아하게 춤을 춥니다. 피리를 불면 코브라가 춤을 추는 묘기를 피우듯이요. 하지만 제가 피리를 불면… 흠흠. 말을 아끼겠습니다. 못하면 안 하면 그만이죠. 저는 아마 선생님보다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기는 (매우 높은 확률로)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값을 치르고 사 오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지도요. 심미적인 차원에서나 비용적인 차원에서나 말이에요.
그러나 어디 인생이 그런 것이던가요?
옛 직장에서 퇴사할 때, 떠나는 저를 만류하며 팀장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니?”
네, 그렇더라고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되는 일도 있더라고요. (아니면 제가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고요.) 도예에 소질이 없어도 흙을 몇 번이고 빚고 엎고를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또다시 엎어야 하는, 부숴야 하는 상태라는 걸 안다고 해서 멈출 수 없습니다.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요. 실패는 다음을 위한 입장 티켓 같은 건지도 모릅니다.
도예 수업은 철저히 감각을 체득하는 과정입니다. 선생님은 입이 닳도록 말씀해주시고, 가끔은 제 손을 붙잡고 감각을 맛보게도 해 주시지만 결국은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 제가 체득해야만 합니다. 쉽게 얻어지지 않는 만큼, 나중에는 쉽게 잃기도 어려우리라 믿으면서요. 오늘날 마법을 부리듯 쉬이 흙을 조종하는 선생님을 저는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흙을 자유로이 다루기 이전에 선생님께도 필시 흙과 무수히 교감하는 순간이 있었겠지요. 웃는 날도, 우는 날도, 기쁜 날도, 화나는 날도 있었을 겁니다. 그에 비하자면 제가 흙을 매만진 시간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저는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무게의 흙을 올리고 무너뜨리는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흙과 교감하는 법은 실패함으로써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별 수 있나요.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도예를 멈추기엔, 너무나 즐거운 걸요. 해보지 않았으면 실패하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즐거울 줄도 몰랐을 테죠.
안 해봤으면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렇지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