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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Dec 20. 2021

살아주겠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인 줄 이제는 알아서

나는야 서른 살 꼬맹이

  엄마와 시시콜콜한 얘기를 많이 나누는 건 아닌데 근래는 곧잘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니 이야깃거리가 늘기도 했고, 그렇게 한마디 두 마디 나누다 보면 세 마디 네 마디도 되는 까닭이다. 왜 그동안은 엄마랑은 이런 잡담을 못 나누고 지냈을까 싶기도 한데. 어쨌든 언어란 물꼬를 터야 비로소 감정이란 흐름이 오갈 수도 있음을 알았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다행이지, 뭐.


  나는 걱정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동면을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대책을 그러모으는 기질이 있다. 겨울이라는 거대한 불안을 요모조모 준비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혹독한 겨울이 올지 모르니까. 예정된 폭격보다는 방심할 때 맞이하는 작은 균열과 파괴가 더 두려우니까. 그런 마음가짐을 네 글자로 표현하면 전전긍긍. 좋게 말하면 배수의 진…? 하여간 나는 성숙한 시민답게 그런 내면의 울퉁불퉁함을 적절히 수면 아래 감추고 살아간다. 물론 나를 낳고 기른 엄마의 동물적인 감만은 피하기 역부족인 순간도 더러 있지만. 


  하루는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엄마가 불쑥 말했다.


— 딸. 뭐가 걱정이야.

— 나 아무 걱정 안 하는데? (근데 이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엄마는 시시때때로 그냥 찔러보기도 하는 것 같다.)

— 아니, 엄마, 아부지 젊겠다.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줄 건데 뭐가 걱정이야. 밑으로는 큰 집채만 한 놈 하나, 작은 집채만 한 놈 하나…


  그러니까 엄마 말은, 든든한 뒷배가 앞으로도 20년은 너끈히 있어줄 텐데 뭐가 걱정이냔 말이었다. 산수에 능통한 나는 재빨리 셈을 한다. 20년이면 내가 몇 살이야… 어, 그건 좀 곤란한데. 49살이 되어도 세상은 험준할 것 같거든. 그래서 나는 재빨리 협상을 시도한다.


— 20년은 좀 그렇고. 40년으로 해 줘.

— 됐네요. 40년이라니. 까마득도 하다.

— 아 왜~! 해 줘, 해 줘!


  나는 이제 서른을 목전에 두고 세 살배기 꼬맹이처럼 떼쓰기를 시전 한다. 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지 않나. 이 세 살의 조르는 버릇을 ‘그러고마’하는 시원한 확답을 듣기 전까지는 여든까지 계속하리라. 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던데. 그러니까…


— 어휴, 40년을 앞으로 더 살아? 지겹다, 지겨워!

— 아 왜~! 살아줘, 살아주기로 약속해. 빨리, 아 빨리!

— 알겠어, 알겠으니까 일단 가!


  엄마는 못 말린다는 눈치지만 별 수 없다. 먼저 나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겠노라고 말을 꺼낸 것도 엄마가 아니던가! 사람이 한 번 말을 뱉었으면 지키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저는 배웠는데요. (네, 제가 이 구역의 우기기 달인이랍니다. 호호.) 마지못한 대답 속에 엄마의 작은 한숨이 폭 감긴 듯도 하다. 우리 딸내미가 저렇게 철없이 구는 걸 보니, 40년을 더 산대도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못내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도 산다는 것이 온전히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부모님이 내 뒷배가 되어주시는 것처럼, 나도 부모님의 뒷배가 되어드릴 수 있는 튼튼한 어른으로 차근차근 성장하게 되기를. 그러나 일단은 즐거운 마음으로 철없는 서른을 맞이해야지.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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