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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Dec 12. 2021

나는 나를 질투한다

나는 지금 얼음이다. 무턱대고 붙인 도발적인 제목 앞에 스스로가 도발된 기분을 한껏 느끼며.


글을 쓸 때 어느 날은 제목을 붙이고 내용을 써 내려가고, 어떤 날은 내용을 다 쓴 다음에야 제목을 붙이는데, 오늘은 전자다. 현재로선 내가 붙여본 제목 가운데 가장 선홍빛의 컬러감이 도드라지는 공감각적인 제목이라는 것이 자평이다. 고로 약간의 당혹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내용마저 자극적이게 써질 것인가는 미지수인데, 제목까지 붙인 마당에 어찌 됐든 질투에 관해 적을까 싶다. 정확히는 질투의 대상에 대한 생각이다.


인간으로 살면서 내가 마주했던 인간적 고뇌 중 하나는 '시기심'이다. 타인의 훈장은 늘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시야가 좁으면 그만큼 스스로를 장벽 안에 가두기 쉽고, 나는 부러움이란 감옥의 오랜 수감자였다. 백조를 보고 그 우아함에 감탄하면서 수면 아래의 치열한 발길질은 간과하기가 쉬웠다.


나는 늘 무언가를 부러워했다. 갖지 못한 것을 탐했다. 인생의 불공평함에 대해 생각했다. 사진 속의 하하호호 웃는 모습 속에서 동떨어져 나오곤 했다. 충분히 수면 아래에서 발길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왜 나는 저렇게 되지 못할까. 노력할수록 괴리감은 커지기 십상이다. 작은 내 앞에 세상은 수억 개의 디스플레이가 된 지 오래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닌 현실이다. 모두들 삶을 갤러리의 액자처럼 걸어두고 재생하기 바쁘다. 그렇게 잠식당한다. 어쩌면 지배와 피지배의 원리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는 일 없이 영원한 진화를 거듭하리라.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쇠하지 않는 볼품없는 전리품이 되리라.


누군가의 삶을 동경한다는 것은 좋은 동력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좀먹는 일이다. 아슬아슬한 경계부의 삶을 산다. 남을 부러워하는 일과 스스로를 질책하는 일은 너무나 쉽게 양립한다. 하여 우리는 자존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만 것은 아닐까. 애당초 허영심이란 녀석은 과대 포장된 자아를 표출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데. 타인의 허영심과 허풍은 그리 면밀히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누군가는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또 다른 누군가를 동경하는 일. 이것은 현대사회가 만들어 낸 또 다른 생태계이며 먹이사슬이다. 지친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자. 우리 모두가 동심원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내가 3시 방향으로 달릴 때, 당신이 9시 방향으로 달린다면. 우리는 서로 반대 방향에서 서로를 동경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당신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달리고, 나는 당신이 올 수 없는 곳으로 향하지만. 그렇기에 서로가 그리도 매력적인 거라고.


그러니 나는 당신을 질투하지 않는다. 그보다 당신이  멀리,  많이 달려 나가기를. 당신이 나아가는  위에 행복과 평화와 행운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빈다. 다만 나는 어제의 나를 질투할 뿐이다. 끊임없이 어제의 나를 질투하려고 한다. 어제의 행복하고 평화롭고 행운이 가득했던 나를. 조금  행복하고 평화롭고 행운이 따르는 오늘의 내가 되고 싶기 때문에. 당신이 지닌 행복과 평화와 행운은 내게는 측량할  없다. 따라서 어떤 무게도 지니지 못한다. 다만 나는 오로지 나의 행복과 평화와 행운만을 측정하고 향유할  있을 뿐이다. 그것만이 내게 온건한 질량을 가진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질투한다.


나무는 시간으로 나이테를 쌓듯, 사람은 세월을 삶으로 쌓는다고 믿는다. 그 삶이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울림이 된다면 좋겠다. 이런 열망은 어쩌면 얼어붙은 나를 하고 두드리는 움직임. 내가 나를 질투하기에, 오늘은 겹겹이 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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