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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Jan 02. 2023

(경) 독감 걸렸네 (축)

Happy 1st influenza anniversary

약국 근무의 장점이자 단점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약국 나름대로 분위기가 다르기야 하지만. 요즘 근무하는 약국은 소아과 밑이기도 한데 동네 약국이고, 무엇보다도 국장님이 정이 많으신 분이라 그런지 단골손님들이 많다. 오며 가며 간식 꾸러미를 쥐어주는 분들도 계시고, 약국을 쉼터 삼아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도 있다. 나도 덕분에 넉살이 늘고 있는 듯하다.


아무튼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여러 에피소드가 파생되곤 한다. 대개는 웃고 넘어가고 마는 일들이긴 한데 간혹 마음에 울림을 남기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이를테면 요즘 유행하는 독감 때문에 약을 받으러 온 형식(가명)이가 그랬다.


형식이는 독감 환자치고는 제법 멀쩡한 낯빛(?)을 하고서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는데 형식이 어머님은 시원스레 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래, 인생 첫 독감 기념으로 사 줄게! 골라!”


나는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아, 인생 첫 독감이에요?”


그러자 어머님은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네, 형식이가 인생 처음으로 독감에 걸렸지 뭐예요. A형이랍니다. 호호. “


어머님 말투는 흡사 형식이가 시험을 봤는데 백 점을 맞았다며 대견해하는 뉘앙스였다. 연이어 그녀는 형식이는 너무나 잘 놀았으니 독감에 걸린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며, 억울해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잘 놀았으면 그만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형식이는 이미 여러 차례 감기는 물론이고 코로나에 걸린 적도 있지만, 형식이 인생에 독감은 아무튼 처음이라고. 그렇게 형식이는 인생 첫 독감을 기념하여 장난감 선물을 받았다. 어머님은 마치 형식이가 독감에 걸린 것에 감탄하고 있으신 것 같았다. 이렇게 면역력이 차곡차곡 쌓이는 거지요, 라면서 웃었다.


나는 복약 안내를 하면서 혼란스러워졌다.


아픈 게 축하할 일인가…?

아프니까 선물을 받아…?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기 때문이다. 아픈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곤 할 수 없고, 이왕이면 안 아프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세상 아닌가. 하물며 자식이 아프면 부모의 얼굴은 더 어두워지는 것만 보아서일까. 호연지기를 닮은 어머니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그렇게 형식이는 독감에 걸린 허연 낯빛이긴 했으나 전리품을 들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첫 독감에 걸린 형식이는 제 등을 툭툭 두드리는 어머니의 품에서 앓다가 금세 나으리라. 아픈 것도 괜찮다. 이것도 기념할 일이라는 너른 마음속에서 자라나겠지.


한때 산다는 일은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왜 사는 것일까에 대한 답이 있다면 삶이 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정답이 있다면, 적어도 정답을 찾는 여정만큼은 방향이 명확하니까 헤매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방황하는 시간은 이리저리 흔들리느라 버거우니까. 모서리가 깎여나가는 것은 어찌 되었건 아픈 일이므로. 난 아픈 건 싫은데.

허나 정답 같은 것은 없다.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오롯이 경험하는 삶에 초점을 둔다면 아픈 것도 기념할 일이 된다. 뒤척이는 궤적이 걸작의 밑그림이 된다. 그러니 인생 첫 독감에 걸려 씨게 앓는 오늘을 기념하지 않을 방도가 없지.


아픈 오늘도 기념할 만한 날이라는 조기교육이라니. 웃으며 돌아가는 모자를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어쩐지 형식이가 조금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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