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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Feb 18. 2023

안티에이징보다는 웰에이징을

두 번의 서른을 살며

2023년이 된 지도 오래다. 양력으로 따져보나 음력으로 따져보나 그러하다. 앞구르기를 하고 보고 뒷구르기를 하고 봐도 그렇고. 서서 보고 앉아서 보고 누워서 봐도 그렇다.


언젠가는 새해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고 일기장 따위에 지난해를 무심코 적었다가 뒤늦게 두 줄을 찍찍 긋기도 했더랬다. 근데 올해는 유달리 2023년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스무스한 것 같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넘어온 올해를 마주하는 나는 순순함 그 자체였다. 1/1보다는 12/32로 이어지는 듯한 기묘한 부드러움을 느끼며.


그래서인가, 새해에 들어서 몇 살이냐는 물음에 나는 별생각 없이 그냥 서른이라고 대답해버리고 만다. 특별히 서른한 살이 되는 것이 싫기 때문은 아니다. 한 해를 더 살았으니 한 살도 더 먹는 것이 지당하나 새해가 너무 자연스럽게 당도한 탓에 나이가 넘어가는 담벼락을 좀체 실감을 못해서 그럴 뿐이다. 기실 일단 내 나이는 몇입니다, 하고 말할 일이 그다지 없으니 별 상관도 없을 테고. 다만 내 본연의 마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는야 서른’이라는 사실에 대한 한 치의 의심이 없다는 점, 바로 그 부분을 간혹 기이하게 느끼곤 한다.


이런 와중에 정부에서는 6월부터는 만 나이 제도를 시행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잘 됐지 싶다. 나이를 깎았다 늘렸다 고무줄 바지 삼아 이야기하는 광경을 상상하곤 하는데 자못 우스꽝스럽다.


- 지난번에는 서른 하나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 그땐 그랬고 지금은 아니랍니다. 호호호.

(세상만사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일까.)


그리하여 나는 서른 하나가 되었다가 스물아홉도 되었다가 서른도 되었다가 하는 들쭉날쭉한, 그야말로 성가신 방식 대신 그냥 서른의 변두리에서 2년 좀 넘게 살기를 택했다. 희한하게 그렇게 서른한 살을 유보하고 나니 사회와 시대가 부여하는 서른 즈음의 역할 분담으로부터도 얼마간 유예 기간을 하사 받은 듯한 기분도 든다.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서른을 두 번 살게 해 주었는데, 이는 30이라는 숫자를 넘어서 어떤 여유와 넉넉한 마음가짐 따위를 불러일으키는 요사스러운 면이 있다.


그동안 나는 나이라고 하는 것은 살면서 마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름대로 객관적인 지표라고 생각해 왔다. 예를 들면 한국인이라거나, 여성이라거나, 성이 오 씨라거나. 말하자면 의견보다는 사실로 불리는 것들과 같다고. 즉, 나이란 어떤 취향이나 정서처럼 멋대로 없애고 만들 수 없기에 오히려 단단한 기둥 같은 것이라고. 줄곧 그렇게 여겼다. 서른을 괜히 줄여 스물넷이라 할 수도, 또 괜히 부풀려 마흔넷이라 할 수도 없으니. 서른은 서른의 틀에 박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셈이다.


그런데 합법적 서른 살이를 두 해 정도 하려는 입장이 되어보니 어쩌면 나이라고 하는 기틀도 그리 콘크리트 같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니, 콘크리트가 쩌억 갈라져 거대한 틈이 생겼기에 비로소 그간 잘 몰랐던 나이에 관한 또 다른 진실이 피어오르는 건가? 좌우간 세월을 거치면 나이가 드는 일이야 자명하다 해도 어떻게 나이가 들 것인가 하는 저마다의 몫이 남는다. 이윽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흔한 문장은 참이 된다. 나이는 누구나 먹지만 모두가 잘 먹는 건 아니니까.


안티에이징(anti-aging)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웰에이징(well-aging)을 잘, 제대로, 충실히 곱씹고 곱씹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런 소망을 오늘은 마음속 어느 귀퉁이에 단단히 붙여놓을 요량이다. 내일의 나도, 모레의 나도, 아주 먼 훗날의 나도 만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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