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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Feb 25. 2023

솔로를 왜 ‘탈출’ 해야 하는가

어쩌면 나의 해방일지

나는 솔로다. 어쩌다 보니 그러하다. 사실 지금 내가 누구를 만나고 있고 아니고를 이렇게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에는 딱히 취미가 없는 매우 프라이빗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려고 사생활을 팔아넘긴다. 이렇게 브낳괴(브런치가 낳은 괴물)가 되는 걸까요,,


좌우간 솔로인 덕분에(?) 간간이 소개팅이 들어오기도 하고 그렇다. 특히 우리 국장님은 나의 크로스핏을 등록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이유가 어처구니가 없다. 본인이 점찍어 둔 청년이 있는데 자만추를 하기 위함이라나…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국장님은 내 연애사업에 꽤나 진지하다. 친일도 이 정도라면 앞잡이다. 하루는 국장님 왈, 날더러 ‘나는 솔로’에 출연해 보면 좋을 거 같은데 왜 신청을 안 했냔다. (나는 나는솔로를 본 적도 없다.)


— 제가 왜요?

—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약사님 솔로잖아. 나.는.솔.로.(이때의 국장님 표정 못 잊어,,,^^ㅋ)


나는 그냥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허허허. 국장님은 내가 솔로인 것이 정말로 안타까우신 모양이다. 어디를 가서든 내 짝꿍이 될 만한 자질을 가진 남성을 물색하는 그 마음에는 물론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정작 나는 별로 조급한 마음이 없다. 정확히는 한때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며칠 전에는 다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요즘 만나는 사람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뭐, 그렇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 친구들과 만나는 모임이 있는데 나와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나는 솔직히 말해 내키지도 않았고, 그럴 시간도 없었기에 적당히 고사했다. 실은 요즘 삶의 만족도가 매우 높아져서 그런지 몰라도 별로 연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이다. 친구는 분명히 알겠다고 했는데 냅다 내 상반기 목표를 멋대로 정해주었다. ‘솔로탈출’이란다. 난 아무 목표가 없었는데 말이다.


흠. 솔로탈출이라는 네 글자를 가만히 살펴본다. 언제부터 ‘솔로’가 ‘탈출’ 해야 하는 무언가가 된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커플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인지도… 탈출과 해방과 자유에 관해 논하자면 커플보다는 아무래도 솔로 쪽이 운신의 폭이 훨씬 큰 것 같은데. 그러나 ‘커플탈출‘이라는 말은 없고 ’솔로탈출‘이라는 말만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상 ‘솔로탈출’이란 말엔 다소 어폐가 있다. 정말로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외로움‘이지 ’솔로’라는 상태가 아니니까. 물론 ’솔로’는 외로울 것이라는 만연한 편견을 납득하자면, ’솔로‘와 ’탈출‘이라는 단어의 조합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엄밀히 말해 외로움으로부터의 탈출이면서 괜스레 엄한 솔로가 누명을 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은 왜인지.

과연 ‘솔로탈출’은 ‘외로움탈출’을 보장하나? 근원의 외로움에서 도망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모든 물음에 대해 나는 ‘아니’라고 답할 생각이다. 설사 어찌어찌 도망할 수 있다고 쳐도 결코 타인을 통해서는 이룰 수 없다. 타인은 나의 외로움에 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도 없거니와 되어서도 아니 된다.


물론 타인을 통해 분명히 외로움을 얼마간 면할 수는 있으리라. 허나 근본적인 고독이란 영영 외면할 수는 있는 존재가 아니다. 공허를 잠시 잊을 수는 있을지라도, 공허 그 자체는 결코 제자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으므로. 때문에 우리는 혼자라도 외롭지 않고, 함께라도 외롭다. 그리하여 ‘솔로탈출’이라는 단어는 희망과 소망을 재료로 만들어 진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영원히 외롭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심는다. 실현될 수 없다 해도 환상은 아름답고 고결하다.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해서 지향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고유한 나 자신일 때야 말로 가장 반짝인다는 삶의 조그만 명제.


뭐. 언젠가 인연과 때가 맞는다면 나도 내 짝꿍을 만나게 되겠지. 찾든 아니든 아무렴 어떤가 하는 느긋한 마음도 일고. 사실 요즈음의 나는 솔로를 되찾아 수시로 기쁜 마음이 든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순간은 오붓하게 함께라서 좋았고, 고즈넉이 혼자인 것은 혼자라서 좋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을 알기까지 시행착오가 없지는 않았지만.


당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발버둥을 치는가.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파스칼의 문장에서 찾은 것도 같다.


모든 인류의 문제는 인간이 혼자 방에 앉아 조용히 앉아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 파스칼


솔로탈출을 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진정한 솔로회복은 아닐까. 타인과 동반하는 삶을 선택하기에 급급해 내 본연의 자리에 머무는 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는 법도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나의 중심으로 설 줄 알 때 비로소 동반자와도 건강하게 동행할 수 있으리라. 진정한 의미의 솔로탈출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 친구가 마음대로 내뱉긴 했지만 — 솔로탈출이라는 목표는 나름 유효한 것도 같다.


서른. 어쩌면 제법 이립(而立)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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