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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Feb 28. 2023

내돈내산 괴로움

그러나 끝은 창대하리라!

어쩌다 보니 치아 교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라는 표현이 붙는 까닭은 이러하다. 어느 날 앞니 틈새가 시린 느낌이 들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레진으로 간단히 때울 수 있다고 했다. 해결책이 있으면 굳이 지체할 필요가 없지. 재빨리 예약을 해서 치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 왈, 내게는 4개의 선택지가 있단다. 첫째는 라미네이트로 앞니를 대량 삭제하고 세라믹으로 된 치아를 앞에 내세우는 방법이고, 둘째는 치아를 다소 삭제하고 전체 다 덧씌우는 방법, 셋째는 치아를 조금 삭제하고 틈새를 레진으로 때우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아를 삭제하지 않고 교정을 통해 붙이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초등학생 때 6개월 정도 짧게 교정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하니, 원래 유지장치를 하지 않으면 성인이 되면서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한다나. 이 죽일 놈의 관성(?). 나는 사랑하는 연인이 1g이라도 사라지는 걸 원치 아니하듯 나의 치아를 1g도 삭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고백하니 의사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 그러면 답이 나왔는데요? 교정을 하시면 돼요!


그러나 그 치과는 교정을 하지 않는 관계로 나는 일단 스케일링만 하고 나와서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교정 치과를 찾게 되었다. 이곳의 선생님은 본을 떠서 내 구강 구조를 아주 면밀히 살펴보셨다. 코와 입의 각도, 턱의 구조, 치아의 깊이와 배열, 치아 사이의 여백과 치열 등…


뭔가 일이 제대로 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 이 정도 상태라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형을 받기를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도 이와 비슷할까?


— 투명교정을 하실 수 있겠는데요.


나의 예상은 이렇게 보기 좋은 방향으로 빗나가고 있었다. 레진 치료에서 부분 교정으로, 부분 교정에서 투명 교정으로.


— 윗니만 하실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윗니가 교정되면서 배열이 조정되면 아랫니와 마찰이 생길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윗니랑 아랫니를 같이 하는 편이 좋겠어요.


윗니만 하는 교정에서 위아래를 다 하는 교정으로…


삼십 살쯤 살면서 얻은 나름의 논조 덕분에 나는 그리하여 위아래 모두 투명교정(인비절라인)을 하게 되었다. 나의 논조는 다음과 같다: 하나, 매를 맞으려거든 한 번에 맞는 게 낫다. 둘, 한 번 할 때 제일 좋은 것으로 제대로 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모두를 가장 절약할 수 있는, 제일 저렴한 방법이다!


사실 철사로 두르는 교정을 안 하는 것만 해도 감사했고 교정 기간이 그리 길게 예상되지 않는 점도 다행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치료에 관해 전반적인 플랜을 세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교정기를 받아 끼웠다. 겉보기엔 자세히 보지 않으면 투명해서 교정기를 꼈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다. 이렇게 24시간 중 22시간을 착용하기만 하면 교정이 된다니. 세상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아팠다. 그제야 드는 생각. 맞다. 교정은 원래 아팠지. 근데 난 왜 투명교정은 아픔까지도 투명할 거라 지레짐작을 했던 걸까.


어디에 얻어맞는 것도 아니고, 찧이는 것도 아니지만 그 특유의 옥죄는 듯한, 그래서 몸이 배배 꼬이는 듯한 미묘한 통증… 이제껏 탈선하던 치아들이 갑작스런 중앙정부의 쇄국 정책에 당황하며 몸서리를 치는 것을 나는 느끼고야 말았다. 아주 아픈 것도 아니오, 안 아픈 것도 아닌 오묘한 이 아픔… 그 누가 준 것도 아닌, 그야말로 내돈내산 아픔이다. 내돈내산이라 어디 가서 앓는 소리를 하기도 민망한…


점심에 가만히 죽을 뜨며 생각했다. 세상에 그런데 내돈내산 아픔이 아닌 아픔이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값을 치렀기 때문에 아플 수도 있는 거라고. 선불이든 후불이든… 아픔마저도 공짜가 아니라니. 그렇게 보니 이 순간의 지끈거림은 아무래도 괴롭지만, 비용을 지불했기에 비로소 느껴볼 수 있는 희소하고도 귀한 것이지 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픈 일이 안 아픈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다만 좀 더 아픔을 포용하게는 된다.


뭐. 산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은 아닐까. 삶을 선택한 나는 시시 때때로의 통증도 견뎌나간다. 그 역시 내돈내산 고단함이 아니고야 뭘까. 어쩌겠는가. 내가 이렇게 살기를 선택했으니 잇따르는 값도 내가 치를 뿐. 그러나 너그러운 삶은 언제나 내가 치른 값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안긴다는 것을 믿는다. 아마 반년 뒤의 나의 가지런한 치열도 그러하리라…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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