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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06. 2023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오직 모르는 것을 압니다

  너무 유명한 문장(?)이라 거론하기 괜히 멋쩍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꺼내 본다. 내용은 말이 있다가 없다가 새끼를 쳐서 돌아왔다가 아들이 말을 탔다가 다리가 부러졌다가 전쟁이 났다가 징용을 안 나가 목숨을 건져… 하는 얘기다. 즉 인생에는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많으므로 ‘일희일비’ 하지 말라는, 지당한 교훈을 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옛 격언이 무수한 세월을 넘어 오늘 21세기 첨단 문명 시대까지 이어져 올 수 있는 비결은 그 말이 시대를 막론하고 ‘참’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아무리 과학 기술이나 의료 기술이 발달한다 한들 인생이라는 큰 바다에 이는 파도의 모양이랄까 양상 같은 것은 조선 시대 때의 것이나 오늘날의 것이나 매한가지다. 21세기는 21세기의 방식을, 15세기는 15세기의 방식을 따를 뿐이다. 그래서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지식을 활용하는 타임워프형 판타지물이 인기를 끄는지도 모르겠다.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시라.)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격언은 어쩌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요기 베라의 말로도 치환할 수 있는데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끝에 가 봐야 비로소 좋았는지, 나빴는지 판가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전까지의 판단은 모두 무효라는 말도 된다는 거다. 예컨대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격언 속에서 새옹 노인의 이야기는 아들이 징용을 피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이 징용을 피했지만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을 하게 됐을 수도 있고, 패가망신하여 마을을 떠난 덕택에 화마를 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새옹 노인의 삶이 끝나는 무렵이 되어서야 ‘아, 그때 그 말을 들였던 일은 참 좋은/나쁜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건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하는 이야기고, 새옹 이후의 아들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다. 새옹의 경우에서 나빴던 일이 아들의 경우에서는 좋은 일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떤 사건을 두고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 인류적인 차원까지 넘어가자면 +-는 더하면 0에서 수렴한다는 말로 허무한 귀결을 맺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개인적 삶에 국한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솔직히 요즘의 나는 뭐가 좋고 뭐가 나쁜 건지를 도통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예전에는 분명히 좋고 나쁜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대학에 간다 => 좋은 것. 싸운다 => 나쁜 것.’ 같은 식의 범주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 내 삶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굉장히 여러 방면으로 극심한 높낮이의 파도를 보내오고 있다. 개중에는 좋은(줄 알았던) 일도 있고, 나쁜(줄 알았던) 일도 있다. 그것들은 혼잡하게 뒤섞여서 나타났고 나의 정신도 매우 혼잡한 상황이 되었음을 우선 실토한다. 가슴이 한껏 부푸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디가 밑바닥인지 알 수 없겠다 싶을 만큼 절망적인 때도 있었다. 좋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불만을 품는 인간은 없을 것이므로, 불행에 관하여만 논하자면 왜 이런 (알로하 융님의 표현에 따르자면) ‘똥 덩어리’ 같은 일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무한한 의구심에 사로잡혔던 나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주로 하고 있다. 뭐가 좋은지, 나쁜지 나로서는 판단할 재량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내가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나쁘다고 생각한 것에서 분명 좋은 것들이 나왔고, 좋은 줄로만 알았던 것에서 나쁜 국면을 발견하는 일은 그다지 예삿일이 아니다. 곰돌이 푸였나? 아무튼 어떤 만화에서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기쁘다’고 했는데.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이게 무슨 일인지를 당최 모르겠다. 일종의 정신적 마비 상태인 건가? 싶은 때도 더러는 있다.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믿었던 나는, 어쩌면 합리적 사고라는 틀에 인간을 너무 끼워 맞추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인간은 사실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이성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삶의 속성도 그렇다. 대체로 느닷없다. 별로 느끼고 싶지 않은 감각들까지 느껴야 되는 날도 있고,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은 느낌이 드는 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느낌일 뿐, 명백하게 좋다 나쁘다를 논할 수가 도통 없다니. 내 뇌가 진짜로 마취된 것인가? 이성의 신봉자(?)에 가까웠던 나의 뇌는 이제는 구실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인가! 뭐, 정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뭐가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는 게 꽤 괜찮다는 점이다. 평상심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일 수도 있고, 포용과 수용과도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나는 아주 작다.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티끌 같은 내가 태산 같은 삶을 일찌감치 재단하려 들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하여 뭐가 좋은지, 나쁜지를 판가름하는 행위 자체를 멈추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삶으로부터. 죽을 때가 되어도 뭐가 나빴고 좋았는지는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삶은 제가 펼쳐져야 하는 방식대로 펼쳐져 왔음을 오롯이 알게 될 것이다. 입가엔 빙긋 미소를 지을 것이다.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기 위한 여러 방편들을 밑거름으로,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곳에 닿게 되리라.


  그래서 오늘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이것은 제법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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