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내가 귀여운 탓인가
소아과 밑에서 일하는 것의 장점 중 하나를 꼽자면 역시 귀여운 아기들을 볼 일이 많다는 점이다.
요즘 아기들은 속눈썹이 어찌나 긴지 공작새의 깃털처럼 우아하다. 작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모양은 얼마나 신기한지 모른다. 내내 안겨있던 녀석이 금세 커서 뚜벅뚜벅 걷는 모양을 보면 박수가 절로 나온다!
나도 어릴 땐 저랬겠지? 걷기만 해도 박수갈채를 받는 시절이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깜찍함에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지어주던 때가 내게도 있었을 텐데. 어릴 때는 귀여우면서도 얼마나 귀여운 지 몰랐다.
아기 때 앨범을 펼쳐 보면 안다. 내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가들은 하나같이 다 귀엽다. 어느 한 군데 빠짐없이 그렇다. 그런데 여든 먹은 노인 눈에는 오늘의 나도 그렇게 귀여운가 보다. 정말이지 어르신들은 날 귀여워한다. 뻔뻔스러운 발언 같겠지만 사실인 걸… 약국에서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웃의 어르신들에게도 난 그냥 귀여운 사람이다. (그분들은 표현에 매우 적극적이시기 때문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귀여움을 한껏 당하면 그저 웃지요.
근데 속내는 이러하다. (;;(진땀)이 포인트다.)
저도 앞자리에 3을 달았는데요...;;
어느 정도 살아보니 세상사 경험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을 텐데요…;;
저, 다 컸는디요…;;
즉, ‘난 안 귀엽다’ 하는 부연 설명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다. 물론 내색하진 않는다. 속으로만 뻘쭘해할 뿐.
그러나 역시 귀여움 당할 때는 멋쩍으니 그냥 머리를 긁는다. 저도 머리가 제법 컸는데요, 라지만 산 세월로 따지자면 그분들에 비빌 수는 없고.
생각해 보건대 내가 나를 귀여워하긴 어렵다. 내게 있어 지금의 나는 살며 본 중 가장 나이 든 존재이기 때문에 ‘귀여움’과 가장 거리가 먼 게 당연하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나는 내가 살아볼 순간 중 가장 어린 날을 경험하고도 있으므로 가장 ‘귀여움’에 가까운 존재가 맞다. 그러니 안 귀여워할 까닭은 또 무얼까. 역시 바라보기 나름인 셈이다.
딱히 귀여움에 나이 제한이 있는 건 아니라면, 어디 한 번 귀여움을 수용해 볼까?
훗날의 내가 오늘의 나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하염없이 귀여워만 하지 않을까. 마치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던 때의 내가 귀엽듯이. 사실 귀여움은 어린이의 전유물이고, 지나간 순간은 다 어린 순간이다. 고로 모든 지나가는 오늘도 실은 다 귀엽다.
어린이의 ‘어린’은 ‘어리석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나온 어린 날은 어리석은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리석음 없이 아로새겨지는 지혜가 있을까. 어른이 되기 위해 어린이의 시간을 거쳐야 하듯, 어리석음의 때는 필수불가결하다. 이렇게 어리석음을 좋게 포장이야 했지만, 어리석은 순간을 탓하는 경우가 없다고 말하면 시뻘건 거짓말이다. 탓한다. 왜 그랬어, 한다.
다만 그마저도 그냥 귀여운 순간인 줄로 안다. 원경(遠景)으로 보면 다 귀여우니까. 훗날의 존재는 언제나 어린이의 모습만 볼 수 있다. 그리고 어린이는 서투름마저 귀엽다.
어리석은 행동이란 결국은 귀여운 짓. 흙을 파 먹는 것이나 투닥거림도 푸흡, 하고 웃게만 되는 귀엽고 바보 같은 짓. 좌충우돌! 실수연발! 뿌엥하고 별안간 우는 소리! 이런 장면, 근데 상상하면 좀 귀엽잖아.
그 나잇대에만 할 수 있는 어리숙한 행동에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고 그냥 귀여움만 잔뜩 묻어난다.
역시 모든 건 내가 귀엽기 때문이라던 인터넷의 밈(meme)이 참이었다니. 역시 사람들 똑똑해. 귀여운 일상, 귀여운 생활, 귀여운 인생.
그리고 귀여운 강아지… (이러려고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