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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Jun 19. 2023

그 많던 와인은 누가 다 마셨을까

다름의 미학

짧은 여행 동안 머무를 숙소에 발을 디뎠다. 구옥을 멋스럽게 개조해 꾸며놓은 모양새가 제법 정감이 갔다. 부엌과 화장실은 공용, 개인실에 침대만 놓여 있는 간소한 시설의 숙소. 공용 시설을 이용해야 한다는 불편한 일면이야 있다 해도 구옥 특유의 예스러움이 묻어나서 나는 퍽 만족스러웠다.


이튿날 아침, 숙소에 있는 누구보다 내가 먼저 눈을 뜬 모양이다. 그 어떤 인기척도 없이 나의 눈은 말똥말똥 뜨였다. 침실 통창 사이로 햇빛이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었고 새가 바깥에서 지저귄다. 이런 순간은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야지. 눈을 비비며 물을 마시러 살금살금 찾아 간 부엌에서 마주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무수히 많은 빈 병. 비몽사몽 간에 생각이 떠오른다.


저렇게 많은 와인을 누가 다 마신 거지?


사실 나의 주량은 형편이 없다. 엄밀히는 주량을 잘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한 주당으로 오해를 산다.) 소위 말하는 죽을 때(?)까지 술을 마셔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게 술이 조금만 들어가면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주변의 걱정과 우려를 산다. 바로 ‘너 술 그만 마셔’라는 말을 듣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이 수준을 어찌 넘어가 술을 더 마신대도 취해서 알딸딸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고로 술을 마시면 어떻게 기분이 좋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면 임계점이 찾아온다. 삐삐—하고 알람이 울린다. 이쯤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술을 더 마실 수도 없다. 그러니 주량을 알 수가 없다. 마치 수도꼭지를 잠그듯 술이 들어갈 틈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즉 술이 몸에 받지도 않고, 술 마실 때의 좋은 느낌도 모르겠고, 그러니 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모르고, 자연히 술을 안 마시게 된다.


그렇게 내가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500ml 맥주 한 캔 정도. 실은 그보다 못 마시는 경우가 허다하다. 술자리에는 곧잘 동석하고 이질감없이 잘 얘기를 하긴 하는데, 그건 내가 대체로 일상적으로 이미 취해있기 때문인 거 같기도…


좌우지간 저 많은 빈 술병을 보며 나는 이 와인병을 비워냈을 숱한 사람들을 상상한다. 그들이 와인을 비웠을 밤을 떠올린다. 눅눅한 어둠과 주홍빛 조명들이 어우러졌을 풍경이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렇게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단지 이 공간을 스쳐 지나갔을 사람들을 멋대로 그려보다가 나는 불쑥 생각한다.


아, 세상에 나 같은 사람만 있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나 같이 술을 못 하고, 술을 즐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 있었더라면 와인을 만드는 유구한 역사 또한 이어지지 못했겠지. 와인에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니 상품성이 없고, 팔리지 않으면 시장성이 없고. 와인 산업은 사장됐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덕에 나처럼 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가끔은 와인 한 잔을 기울일 기회라도 생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나처럼 이른 새벽부터 눈을 떠 해안가를 거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늦은 새벽의 어스름함 속에 묵묵히 잠겨 있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 한때 나의 우둔함은, 나라는 존재의 벽에 갇혀 좋고 나쁨을 저울질하기에 급급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와 닮은 이면을 찾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던. 그러나 어쩌면 나와 다른 당신이 있어준 덕분에 당신의 세계도, 나의 세계도 조금은 넓어지는 게 아닐까. 나와 다른 시선, 나와 다른 사상, 나와 다른 무엇. 우리는 공통되기 때문에도 가깝지만 외람되게도 이질적이기에 또한 가까워질 수도 있다. 세상에 열려있는 마음. 어쩌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조금은 더 열렸을까. 틈이 생겨야 빛도 들어올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역시 과도한 음주는 건강에 해롭습니다.

직업윤리적인(?) 발언으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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