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 공방을 다닐 때 배우는 건 표면적으로는 도예 기술 같겠지만, 기실 내가 배운 건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었다.
물레 위에 흙을 올린다. 얼핏 보면 흙이 저절로 올라가고 내려가고 둥그렇게도 되고 네모나게도 되는 것만 같다. 선생님의 손끝에서 움직이는 흙의 몸놀림은 가벼운 무용수의 춤사위다. 하지만 내가 만지면 흙은 제멋대로 움직여, 한없이 삐걱거리는 어색한 인형극이 된다. 마음은 앞서고 손은 따로 논다. 감이 좀 왔다 싶으면 사라지고 왔다 싶으면 사라지고. 나중엔 ‘그게… 왔었나?’ 싶은 나날의 반복.
분명 재미로 시작했는데 열심을 보태니 부담이 됐다. 왜 나는 선생님처럼 못 할까. (당연하다. 난 선생님이 아니니까.) 아니, 선생님은 차치하고 다른 사람들은 잘만 빚는데 왜 난 안 되는 거지. (원래 남의 떡은 더 커 보인다.)
그렇게 달뜬 마음을 앞세워 흙을 올리면 어김없이 어그러졌다. 생각으로야 척척이다. 화병 나와라 뚝딱 하면 화병이 나오고, 찬합 나와라 뚝딱 하면 찬합이 나오고, 컵 나와라 뚝딱 하면 컵이 나온다. 망상이다. 화병을 빚으면 오묘한 옹기가 되어버리고, 컵을 빚으면 늘어져 접시가 된다. 실상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재빠르게 경험하고 싶다면 물레를 한 번 차 보세요…
조급한 마음을 잠재우면 될 텐데, 공방에 다니는 날이 많아질수록 더 내달리려고 했다. 보는 만큼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손 끝은 매우 정직해서 결과물은 투명하게 엉망진창이다. 조심해서 빚던 예전의 결과물이 차라리 더 나은 날도 더러 생겼다.
나는 도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박물관과 상점에서 기물들의 형태를 구경하고 모방하면서, 정작 내가 무엇을 빚고 싶어 하는지는 모른 채로, 그럴싸한 결과물만을 원했다. 바깥에 목표로 하는 형태를 놔두고 그 틀에 짜 맞추려고 무진 애를 썼다.
잘 안 됐다.
아름다움이란 무척 단순하다. 치우침 없이 균형을 이루면 된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그 균형감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중심을 잡아야만 하는데, 한순간 삐끗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상부의 중심과 하부의 중심이 달라지는 경우도 빈번하다(라고 쓰고 거의 대부분이다,라고 읽는다.) 어느 정도의 불협화음은 멋으로 쳐줄 수도 있겠지만, 완벽한 화음의 아름다움에 비할 수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중심을 지키는 일의 지난함을 알면, 그렇게 된다. 그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비로소 고요한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음을 경험하면, 그렇게 된다.
그런데 중심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이 어찌 도예에만 국한될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들 한다. 그리고 적당히 흔들릴 줄도 알아야 꺾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과 중심을 지키는 일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중심이 없으면 토대는 무너져야 한다. 아름다움은커녕 안전성 자체에 큰 문제가 생긴다. 도자기도 그렇고 삶도 그랬다. 새로 빚어야 한다.
산산조각이 난 다음에야 그릇된 중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숙명 같은 것일까? 그리고 또 흙을 올리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해야 그릇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일일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불쑥 와르르 무너졌을 때, 그제야 중심의 부재를 돌아보게 됐다. 어디로 가기 위해 이토록 표류하는지는 모르는 채 둥둥 떠가는 중에 알았다. 마음속에 북극성이 있을 때 비로소 따라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동안 내게는 가야 하는 길은 있되 가고 싶은 길에 대한 물음이 부재했다는 사실을.
여정은 어쩌면 숙고를 위한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다른 누구의 무엇이 아닌, 나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리라.
덧, 너무나 재개하고 싶은데 일정 때문에 도예 공방을 못 다니고 있다. 조만간 가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