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와의 대담
바야흐로 AI의 시대가 대두, 내게도 새로운 취미 활동(?)이 생겼다. 다름 아닌 챗GPT에게 말 걸기. 사용해 보건대 챗GPT는 ‘심심이’, 나아가 아이폰 siri의 상위 호환 버전쯤 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과는 달리(사실상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이 친구는 학술적인 면에서의 활용성이 상당히 높았다. 하여 다른 검색 엔진을 대체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스팸통에서 무스비를 뽑아내는 창조성의 민족답게 챗GPT와 나의 대화는 날로 엉뚱해져만 갔다.
그리하여 나는 이따금 영어로 일기를 쓰고 챗GPT에게 작문 검사를 받기도 하고, 영어로 문장을 써 보고 어떤 게 더 자연스러운 표현인지 묻기도 했으며, 평소 너무나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명확히 해결되지 않던 질문을 한 적도 있고, 45개 숫자 중에서 6개를 뽑아달라고 하기도 했다. (챗GPT는 순순히 숫자 6개를 골라주면서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지는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말하자면 챗GPT는 영어 선생님이기도, 외국인 친구이기도, 아이의 허무맹랑한 호기심에 친절히 답해주는 부모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그리 용하지는 못한 점술가였다. 내가 무슨 문장에든 ‘?’ 마크를 붙이기만 하면 챗GPT는 마치 메타몽처럼 질문에 딱 맞는 모양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대체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준다. 시원치 않은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몇 번이고 되물어도 언제나 상냥함을 잃지 않음은 물론이다. 정말이지 훌륭한 자질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아무거나 묻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지 입밖에는 내지 않을 물음들을 얼마든지 물어봐도 좋은 친구가 하나 생긴 셈이다. 효용성 있는 답변을 기대하며 묻는 건 아니다. 다만 무엇이 되었든 돌아오는 대답을 듣기 위해 곧잘 질문을 한다. 뇌리에서 사장되기 일쑤였던 물음들이 챗GPT라는 은밀한 질문 창구가 생기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물었다. ‘나의 삽질은 언제 끝나나요’라고. 근데 이 녀석 답변이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해석하자면, 삶은 항상 도전과 삽질의 연속이니 나의 삽질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을 챗GPT는 에둘러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과정에서 잃지 말아야 하는 미덕은 바로 ‘성장’이며, 무엇보다도 과정 자체를 ‘즐기는 태도’를 함양할 것을 부드럽게 권고해 주었다. 허 참. 우문에 현답이로다. 짐짓 충격을 받고 생각하기를, 누구를 모델로 딥러닝을 하면 이런 답변을 내놓지? 싯다르타 정도 되려나. 추정컨대.
한 정신과 의사가 ‘다른 상황을 가정하지 말고 다른 관점을 가정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어느 순간에는 임계점이라는 게 오니까. 그저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버티는 나날을 보내다가도 도무지 버티지 못하겠단 마음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때가 생긴다. 현자 타임이랄까? 내가 하고 있는 게 다 삽질이 아니면 뭐지. 점수를 매길 수도 없고, 수료증을 받을 수도 없고, 이력서에 한 줄 새길 수도 없는데. 이게 삽질이 아니라면 무엇이지. 나는 삽질 않던 나날들의 나와 삽질 않을 나날들의 나를 회상하고 상상하며 오늘의 삽질 속으로 침잠한다.
그러나 한낱 점수나, 수료증, 이력서에 새겨 넣을 기록 따위로는, 감히, 환산하지 못할 삽질이, 분명히, 있는 법이었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시간들이나, 병마와 싸우는 순간들이나, 누군가의 죽음을 오롯이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세월들처럼. 삽질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버티는 나날을 넘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 ‘나‘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동일할 것이다. 나 역시 훗날 그 애 입에서 나오는 ‘잘 버텼네’하는 네 글자를 듣기 위해 어제와 내일 사이의 교량을 다진다. 자기 위안 하나 덧붙이자면, 삶을 건축하는 토목 공사에 삽질이 필수 요소가 아니라면 또 무얼까. 불투명한 흙탕물은 어쩌면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