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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pr 20. 2024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산다는 건 그런 거 아니겠니

  계획대로였다면 지금쯤 마이산 등정을 마치고 내려와 전주 어드메에서 맛깔난 식사를 하고 있었겠지만…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학생들 교육 수료식에 맞춰 생긴다던 남동생의 휴가는, 야간 비행 인원 부족 사태로 인해 잘려버렸다. 자연히 전주 한옥마을을 구경하고 마이산을 오르자던 야심 찬 계획은 온데간데없어졌다. 금요일 근무도 빼고, 토요일 약속도 미뤘건만. 졸지에 귀한 휴가가 생겨 버렸다. 고민했다. 번복하자니 조금 거시기한 상황이라… 냅다 휴가를 때리기로 했습니다. 어디로? 대전으로!


  대전을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계룡산을 오르기 위함이었다. 등산 여행이라고 보아도 좋았을 것이다. 물론 약간의 시내 관광을 곁들인. 등산을 할 생각으로 트레이닝 복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짐은 최대한 줄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고속버스를 예매할 때만 하더라도 2시간이 걸린다더니 도로가 붐볐던 모양인지 2시간 반이 걸렸다. 30분의 격차가 일단 발생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터미널에 내려 1대 남은 타슈(*대전의 따릉이)를 타려고 보니, 체인이 빠져 작동하지 않았다. 10분 정도를 걸어간 다음에야 제대로 된 타슈를 탈 수 있었다.


  가려던 카페에도 가고, 밥집에도 갔지만 아쉽게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계획에 없던 결과였다. 소화가 되지 않아 타슈를 타려던 계획은 취소하고 걷기로 한다. 길을 엉뚱하게 들어 엉겁결에 시장 구경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 시내에서 가보려던 가게들이 문을 닫아 버렸다. 역시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이외에도 계획에 없던 일들이 이어졌다. 타슈가 있어야 하는 곳에 타슈가 없어 헤매야 했고, 늦은 밤 도착한 엑스포타워의 폴바셋에서 커피를 마시려던 계획은 스타벅스에서 밀싹주스를 마시는 것으로 바뀌는 식이었다.


  등산을 하려던 날에는 비 예보가 있었다. 당연히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혹시 몰라 다이소에 들러 판초형 우비를 사 두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미 한밭수목원과 이응노 미술관 관람을 마쳤어야 했다. 하지만 계획이 여러모로 어긋나 보려던 것을 보지 못했고, 가려던 것보다 많이 간 상황이 되어 있었다. 늦은 밤 우중산행을 고심하던 내게 친구들은 말했다. ‘계룡산 정상에 꼭 오를 필요 없지 않아?’ 1시간 정도 오르락내리락해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내 성미를 고려하면 아무래도 산 초입에 가면 완주를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여행을 온 것이지 극기훈련을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애초에 이 여행은 계룡산 등산 때문에 성립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냥 주사위를 던졌다. 다음 날 아침 8시 전에 눈이 떠지면 등산을 감행하기로, 넘어서 눈이 떠지면 못다 한 시내 구경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이미 9시였다. 비는 11시부터 온댔는데 10시에도 이미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계획에도 없던 우산을 샀다. 하릴없이 걸어 한밭수목원을 구경했는데 꽃들이 아직은 다 피지 않은 상태였다. 5-6월 즈음에 오면 딱 알맞게 아름다울 듯했지만 아직은 2% 부족했다. 반면 이응노 미술관은 전시작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됐다. 기대 이상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당연히 계획 밖의 일이었다.


  생각보다 급작스레 피로해져서 어딘가 쉴 곳이 필요해졌다. 체력에 자신 있던 나로서는 예상 밖의 일이었다. 별표를 쳐 둔 온갖 카페들을 제치고, 시내 중심부와는 동떨어진 로스팅 카페에 앉아 여행을 기록했다. 카페가 마침 성심당 분점과 가까워서 본점을 가려던 원 계획을 바꾸어 빵을 샀다. 분점의 엄청난 인파에 놀라 본점에 가는 게 낫겠다 했는데, 후에 본점을 지나가며 보니 분점의 줄은 정말이지 새발의 피였다. 계획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튀김소보로는 구경도 못했을 것이다.


  집에 가면서 이번 여행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계획과는 판이하게 다른 여행을 했다. 계룡산에 오르려 했지만 오르지 못했다. 유명하지 않아도 훌륭한 커피를 제공하는 카페에 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볕이 따사로운 날의 대전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대전도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전부 예측하지 못했고 계획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계획과 달라졌기 때문에 아쉬움이 그림자처럼 뒤따르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여행이 별로였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대전 곳곳에서 충분한 즐거움을 누렸다. 정부 청사 옆 울창한 삼림 속을 누비기도, 타슈를 타고 야밤의 갑천을 달리기도, 빗방울의 자박자박한 소리를 들으며 수목원을 거닐기도 했다. 계룡산에 오르지 못한 건 아쉽지만 볕이 좋은 후일에 가면 될 일이다. 그때 또다시 대전을 찾는다면 다시 만나는 일이 될 테니 반가운 마음은 배가 될 것이다.


  여행은 도통 계획대로 되질 않는다. 그래서 옅게 남은 여운이 오랜 잔상을 남기는가 보다. 제법 아름다운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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