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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함도 사랑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라니

채움과 비움

by 오예

유년의 기억을 뒤적이다 보면 불쑥 어떤 장면이 튀어나오곤 한다. 왜 그 장면이어야만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무의식의 심연 아래에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그 기억에 나는 그저 끌려갈 뿐이다.


어릴 때 방학이면 이모와 고모 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역마의 기운이 있었던 것인지, 나를 묶어두는 학교도 가지 않을 거면 집에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친인척이라 해도 사는 모양은 비슷한 듯 제각각이라 돌아다니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오늘은 느닷없이 그 무렵 둘째 고모 집에 있던 순간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느낌이 말이다. 이걸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베란다에 서서 멀어지는 고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혼자라는 게 실체가 되는 시간. 물론 사라지는 건 잠시일 뿐, 금방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 홀로 되는 느낌을 사실 나는 ‘즐긴’ 것이다.


글로 써 놓고 보니 역시 불충분하다. 그런데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고모가 집에 없다고 해서 내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든다던지, 고모가 있을 땐 할 수 없었던 장난을 친다던지 하는 것도 아니었다. 고모가 있고 없음이 내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진 않았다. 내게 무슨 속셈이 있어 고모가 집을 나가주길 바란 것도 아니다. 그냥 고모가 집을 나서야 하는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오기도 하니까. 그런 우연한 순간이면 고모가 멀어지다가 이윽고 내 시야에서 마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을 나는 좋아했다. 가슴도 왠지 두근거리고 어딘가 찌릿찌릿한 것 같기도 한 느낌… 그래서 나는 가끔 고모가 날 두고 외출하기를 기다렸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내 입으로 밝힐 수는 없었다. 일단 그 느낌이 무슨 느낌인지를 당시의 나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거니와 말을 하게 되면 더는 그 느낌을 이전과 같이 즐길 수 없을 것 같은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던 탓이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좀처럼 예전과 같이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마 오고 감이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그렇겠지. 그래도 아주, 정말이지 아주 이따금 그런 느낌을 다시 느낄 때가 있다. 툭툭 앞만 보고 걸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는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 비로소 느껴지는 기묘한 희열… 무언가 가슴이 시큰거리는 그 감각. 이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아주 짧은 순간에 만나게 되는 공허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무것도 없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나 홀로 남는 순간, 곁에 아무도 없게 될 때만 느끼는 기묘한 감각을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까. 달콤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온갖 감정의 뒤섞임을... 어른이 되면서 사라진 줄 알았던 이 느낌은 때때로 다시 나타나서 어린 시절의 나에게로 지금의 나를 이끈다. 그럴 때면 몸은 분명 커버렸는데 그때 느끼던 감정만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해서 가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긴 시계열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는다. 텅 비는 느낌. 기쁘기도 두렵기도 한 그 느낌을 좋다, 나쁘다 점수 매길 수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은근히 그 복잡 미묘한 감각을 즐겼다는 사실뿐.


공허함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불쑥 자각하고 놀랐다. 어떻게 공허함마저 사랑함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뻥 뚫린 자리에 무언갈 채워 넣기 위해 이토록 고군분투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 채워넣음이야말로 공허를 느끼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아닌가 싶어진다. 내내 멀어지기만 하던 고모의 뒷모습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고모가 내 곁에 있어야만 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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