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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27. 2021

이해하지 말고 그냥 외워!

이제는 이해하는 받아들임의 미학

  대학교 재학 시절에 조금 특별한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다소 기분파셨던 L 교수님. 어느 때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낭랑한 목소리를 뽐내며 수업을 하시기도 하고, 어느 날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등장하셔서 그 분위기만으로 학생들을 압도하시곤 했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분이라, 매 수업 전에 과대가 교수님의 '오늘의 기분'을 마치 '오늘의 날씨'인양 공지하곤 했을 정도니까. 오늘은 화창한지, 소나기인지, 아니면 호우주의보가 내려 각별히 주의를 요하는 수준인지...


  그분의 수업 역시 체계적인 듯,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듯 자유분방하게 이루어지곤 했는데, 요점을 한참 집어주시다가도 갑자기 삼천포로 얘기는 너울너울 빠지곤 했다. 대부분 교수님의 유학 시절을 담은 미국 얘기나 교수님의 학창 시절 -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울고 있으면 부모님이 크림빵을 사주셨다는 그런 류의 - 이야기였다. 진도가 걱정이 안 되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또 그런 얘기들은 나름대로 듣는 맛이 있어서 늘 잠자코 있었다. 다들 일심동체였던 모양이다. 눈치 없이 누군가 손을 들고 '교수님, 수업하셔야죠' 하는 직언을 하는 불상사는 다행히 벌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갑자기 뇌우가 쏟아지는 상황은 모두들 피하고 싶었던 게지. 우산도 없는데.


  아무튼 한 학기가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기만 하면 좋겠지만, 교수님도 엄연히 '교수님'이라는 본분이 있으신 법. 학생들은 자고로 평가를 당해야 하고, 교수님은 시험을 출제하셔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업 진도를 빼야, 문제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L 교수님의 수업은 초반에는 굵은 실타래처럼 느슨하다가 시험 기간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바늘땀처럼 촘촘해지곤 했다. 몽환적인 학기 초반의 수업에 말없이 동참했던 공범자가 된 입장이라, 학생들은 쏟아지는 ppt에 신물을 내면서도 연신 속으로 삼켜내기 바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렇게 미친듯한 속도로 수업 진도를 빼다 보면 어쨌든 목표 지점에 어떻게든 도달하긴 한다는 거다. 교수님도 아무튼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게 있으셨던 모양이다. 왜 다이어트 명언으로 "치킨은 살 안 쪄요. 살은 내가 찌지."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있지 않은가? 시험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님께는 문제가 없다. 다만 문제는 학생들에게 있을 뿐. 하여튼 그렇게 수업이 끝나면, 한국어로 번역도 잘 안 되는 각종 영단어와 낯설기만 한 외계어에 가까운 각종 약물과 가이드라인 등... 내가 가진 양동이에는 다 담기지 않을 것만 같은 지식의 홍수가 일어난다. 그렇다. 재난이다.


  당연히 시험에 가까워질수록 쏟아지는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댐이 감당을 못하고 하나 둘 터져나간다. 학생들의 이런 푸념을 교수님도 모르실리 없다. 하지만 그분은 딱 두 문장만을 내뱉으셨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외워[애워]! 뭔 말인지 알지?"

  (그분의 '외워'는 발음상으로 '애워'로 들리기도 해서 우리끼리는 농담조로 '애웠니...?'라며 비관된 대화를 하기도 했다.)


  사실 '뭔 말인지 몰랐'다. 그도 그럴게, 나는 그 '무작정 외워'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다. 대학생 시절엔 평생의 업이라 봐야 '공부'뿐이었기에, 나름의 공부 철학이나 신념이란 게 자그맣게나마 있었다. 그 녀석은 '공부란 자고로 '이해'가 되어야 머릿속에 자연히 박히고, 반복을 하면서 '외우는' 일이지', 하고 고개를 빼꼼히 쳐들곤 제 크기만큼이나 작게 툴툴거렸다. 들입다 외우라니. 너무 배째라 아냐? 지금이야 우여곡절이 다 끝난 뒤니 추억이라며 웃고 말지만, 당시엔 그냥 외우라는 말이 어찌나 곧이 들리지 않던지.


  우습게도 학교 공부할 때는 그렇게 납득이 안 가더니, 뒤늦게 삶을 배우다 저 문장이 콱 박힌다. 이제서야 '이해하려 들지 말고 외우라'던 말을 '이해'하고 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머리가 더 커지고 나서야 L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렴풋하게 '뭔 말인지 알겠는' 상태가 되었으니, 이래서 연륜을 무시 못하는 걸까나.

  어떤 일들은 아무리 예시를 숱하게 보고, 이해해보려고 애를 써도 도통 모르겠다. 그럼에도 용을 써 본다. 위에서도 보고, 아래에서도 보고, 왼쪽에서도 보고, 오른쪽에서도 보면서. 허나 아무리 다각도로 뜯어본다 한들, 영영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는 사실만을 알게 될 뿐이다. 어렵다.


  그러니 그냥 외워야 할 것은 외우는 수밖에. 외우고, 또 배우자. 이런 일도 있구나, 이런 경우도 생기는구나, 이럴 수도 있구나! 하면서. 죄다 감탄문이다. 희한한 일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꼭 감탄을 자아낸다는 게. 이렇게나 인생에 감탄할 것들이 가득하다면, 달리 생각할 때 역시 멋진 일이지. 오늘은 어쩐지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다. 기분 탓인가.


  "뭔 말인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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