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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Oct 22. 2021

멍약 중의 멍약

카피라이터가 누구일까?

  

약국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약이 정말 많다.


  포장은  어찌나 하나같이 네모반듯한지. 그렇게 생김새는 비슷해도 용도는 저마다 각양각색이라는  신기한 일이지 싶다. 정말 다양해서 가끔 환자분들이 어디 아플  먹는  주세요,라고 하면 속으로 혼자 놀란다. ‘이렇게도 아플  있지' 싶어서


  아무튼 그게 그거 같아 보이는 약장 속에서 익숙한 몸짓으로 약을 꺼낸다. 가끔 약을 골라내는 가운의 펄럭거림이 하나의 춤사위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두통약이나 변비약, 소화제, 감기약을 꺼내는 빈도가 팔 할이지만…


  일반약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대개 패키지 디자인이 직관적인 편이다. 아무래도 '약'이라 그런가, 이런저런 활자가 그득하다. 코감기약, 목감기약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질환을 특정하는 경우가 제법 흔하고, 액상형으로 효과가 빠르다거나, 무슨 맛이 나서 불쾌감이 없다거나 하는 식으로 제형의 장점을 어필하는 경우도 많다. 또 생약 성분을 배합해 한방 효과까지 볼 수 있다거나 함량을 높여서 약효도 세다는 식도 있고. 내지는 졸음을 줄였습니다, 하며 부작용을 덜어냈음을 강조하는 등...


  그래도 보통은 환자분들이 오셔서 '어디 어디가 아픈데, 뭘 먹어야 하나요?'라고 물으시면 권하는 건 약사의 몫이 된다. 어쩌면 패키지를 가장 열심히 들여다보게 되는 건 역시 약사인지도...?


  며칠 전 근무하는데 한 환자분이 오셨다.


  “멍 빼는 약 좀 주세요.”


  멍 빼는 약이라. 멍 빼는 약은 헤파린 나트륨이라고 하는 혈전용해제 성분의 겔(gel)이나 그 계열의 크림류를 주로 쓴다. 그 외에도 은행엽 추출물이랄지, 비타민K류를 쓴다.


* 잠깐 막간의 지식(?)을 나누자면, 헤파린 나트륨이나 은행엽 추출물은 대표적인 '항응고제(피를 묽게 함)'이며 비타민K는 '지혈제(피를 굳힘)'라서 효과가 정반대라는 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멍'이라는 하나의 질환을 두고 성격이 정 반대인 2종류를 쓸 수 있는 걸까?!


  '멍'이란 무엇인가. 몸이 어딘가 부딪히면 피부 밑의 정맥, 모세혈관 등이 터지면서 출혈이 발생하고 이것이 응고되며 멍이 된다. 이때 헤파린 나트륨 같은 항응고제 류는 이런 혈관의 출혈을 억제함으로써 멍을 빼는 효과를 보인다. 그렇다면 비타민K와 같은 지혈제는 어떨까? 멍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물질은 혈색소인 헤모시데린(Hemosiderin)인데, 비타민K는 헤모시데린의 생산 및 확장을 억제시켜서 멍이 생성되지 않도록 하는 효과가 있어서 마찬가지로 멍에 사용할 수가 있다.


따라서 타박상이라면 헤파린 나트륨과 같은 성분의 제품을, 레이저나 미용시술에 의한 멍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라면 비타민K가 들어있는 제품을 쓰는 것이 적절하겠다.


  해당 환자분은 타박상이라, 역시 헤파린 제제의 크림을 건네드렸다. 멍 부위에 얇게 여러 번 바르시라고 안내해드리고 나서 불쑥 약 패키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데 너무나 강렬한 문구 여섯 글자.


'멍약 중의 멍약'


  두둥. 이 강렬함이란. 명약 중의 명약도 아니고 멍약 중의 멍약이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떤 성분이 더 들어갔고, 제형이 어떻게 개선됐고, 뭐가 좋다고 줄줄이 나열하는 것보다 짧은 여섯 글자가 더 큰 임팩트가 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누가 카피를 짰을까. 아무래도 다른 약들마저 유심히 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불쑥 들었다. 이런 것도 약국의 소소한 재미라면 재미려나. 뭐, 겸사겸사 공부도 되고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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