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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05. 2021

욕망이라는 이름의 다이어트

  세상에 ‘다이어트’라는 단어만큼 괴기스러운 네 글자의 조합이 또 있을까. 어원부터 섬뜩하다. 이 단어는 다이(die)라는 접두사와 ‘어트’라는 접미사로 구성된다. 영단어인 다이(die)는, 죽다라는 살벌한 뜻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문으로 ‘아 윌 킬 유 유다이’가 있다.) 의성어인 ‘어트’란 탄식의 표현으로서, 닭가슴살과 고구마에 질릴 대로 질린 영혼이 내뱉는 단말마의 비명이다. (사실 나는 여기에 의태어 하나를 더하고 싶다. 다이(die) + 어트 + ‘풀썩’)


  옛 말에 ‘10kg 뺀 사람과는 친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저는 참 사교적인 사람입니다.) 사실 일리 없는 말은 아니다. 사람 만나면 1차로 밥을 먹어야 하고, 2차로 빙수 또는 케이크를 먹어야 하며, 3차로 술도 마셔야 한다. 더욱이 사람 만날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연히 운동할 시간도 부족해진다. 때문에 발을 걸친 인간관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다이어트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정도의 난제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10kg 감량에 성공한 사람들은 분명히 야망을 위해 우정 따위는 가볍게 내던질 수 있는 냉혈한이 틀림없지. 암.


  그렇다면 도대체 다이어트를 왜 할까? 물론 건강상의 이유로 필요한 경우도 있다. 허나 상당수는 ‘마른 몸’이 ‘자기 절제’와 ‘자기 관리’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암묵적인 -그러나 만연한- 사회적 분위기를 이유로 한다. 때문에 오늘날 ‘다이어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생의 과제가 됐다. 그러니 다이어트를 하다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타이밍엔 꼭 ‘어트’하는 한숨 섞인 탄식이 새어 나오고, 몸은 ‘풀썩’ 쓰러지는 경험을 하고야 만다. 네 글자의 기묘한 조합에 치를 부들부들 떨면서.


  사실 마른 몸이 늘 ‘아름다움’의 척도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대에 인류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체형은 뚱뚱한 비너스상이다. 그럼 고대인들만 그렇게 독특한 안목을 가졌던 걸까? 그렇지 않다. 미국의 잡지인 플레이보이 표지 모델은 경기가 불황인 때일수록 풍만했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모순적이지 않은가? 음식이 부족할 때일수록 뚱뚱한 사람이 각광받는다니 말이다. 결국 인간이 인지하는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이란 얘기가 된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만이 ‘절대적’ 일뿐.


  제 손에 들린 떡보다 남의 떡을 흘깃 곁눈질하는 행태는 다이어트에 국한된 게 아니다. 잡은 물고기 보단 잡지 못한 물고기에 애가 탄다. 바라던 학교나 회사에 들어가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존재라는 건데, 이 ‘결핍에의 추구’가 보이는 양면성이 흥미롭다. 이는 경쟁에의 부추김으로도, 동시에 미래를 향한 부단한 노력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니까. 이는 경쟁을 과열시키는 요인이 될 수도, 다양성이 성장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어디에 무게를 싣을지는 개인의 선택일 뿐.


  세상에 ‘다이어트’라는 단어만큼 괴기스러운 네 글자의 조합이 또 있을까. 인간의 욕망-식욕-을 거스름으로서 인간의 욕망-마른 몸으로 상징되는 희소성-을 성취하는 행위. 그야말로 ‘욕망을 위한, 욕망에 의한, 욕망의’ 다이어트가 아닐 수 없다. 나의 욕망의 부등식도 그렇다. 그까짓 사회적 풍토 따위야 뭐가 대수랴, 하며 다이어트 따위 무시하고 오늘을 즐길까 하면, ‘그래도’라는 접속 부사가 황급히 따라붙는다. 타인의 눈에 비칠 나를 위한다기보다는,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모습에 무게를 두게 된달까. 그러니 오늘도 ‘일단은’ 다이어트를 해 보기로 한다. (풀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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