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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07. 2021

느림의 미학

출근의 추억

  7시 40분이었다. 내가 집을 나선 시간이. 그리고 출근은 8시까지. 직장이 바로 코앞이 아닌 이상 도어 투 도어로 20분 안에 지각을 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아침에 딱히 늑장을 부린 것도 아닌데 —라는 건 어디까지나 나만의 생각이지만 — 왜 이렇게 늦어졌지? 했다. 그러나 생각이란 걸 할 여유 같은 것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택시, 택시를 불러야 했다.


  아파트 1층에 나와서 택시를 타야지 하고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눈앞에 전동 킥보드가 보였다. 요 며칠 전 무심코 ‘언젠가 한 번은 타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플을 다운로드하여둔 게 떠올랐다. 직장까지는 자전거로 열심히 달리면 딱 15분이 걸리는 거리. 전동 킥보드는 단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냅다 어플을 켰다. ‘스캔해서 라이딩을 시작하세요.’ QR코드를 찾아 접속하고 잠금해제를 했다. 이제 달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운전면허증과 신용카드 정보를 등록하란다. 아뿔싸. 안 그래도 다급한 아침을 더 지체해서 여기서 늦어지면 정말로 지각인데!


  사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무슨 정신으로 후다닥 등록을 해 낸 건지도 의아하다. 아무튼 보통 때라면 1시간 2시간에 버금가는 1분인가 2분인가를 할애했을 것이다. 그렇게 (무슨 자신감인지) 킥보드에 폴짝 올랐다. 유년 시절에 킥보드를 타고 자유로이 달린 덕분인지, 어렵지는 않게 탈 수 있었다. 문제는 급한 마음이었다.


  어쩌면 지각을 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무턱대고 선택한 방법이었는데, 예상보다 속력이 아주 빨랐다. 시속 30km에 육박하는 킥보드라니. 자그마한 발을 굴러 타던 유년의 귀여운 것과는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그렇게 탄지 얼마 되지 않아 가로수로 돌진... 브레이크를 사전에 좀 잡아두어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크게 부딪히고야 말았을 거다. 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위기를 일단락하고 또 달리는데 이번엔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는 게 문제. 속도가 붙으니 관성도 커져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은데 사람들은 오고 가고. 비 사이로 막가 보다는 사람 사이로 막가를 시전 하다가, 이건 아무래도 위험하지 싶어서 브레이크를 꾸욱 꾸욱 눌러가며 속도를 줄여 내달렸다.


  그렇게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내리 달렸다. 5분만 더 있었어도 가을 아침의 차가운 바람을 만끽하며 여유로운 드라이브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속방지턱과 오고 가는 차량들만 겨우겨우 조심해가며 8시라는 기한을 맞추어야 했으니. 있는 힘껏 킥보드를 발로 찼다가 영광의 멍을 얻기도 했지만, 조금 아픈 게 대수일까 마음이 급한데. 그렇게 골목과 대로변이 이어지는 길에서 또 서서히 달려 나가는데 골목에서 나오려는 차를 미처 보지 못했다. 아뿔싸!


  정말 다행인 것은, 그 차도 느리게 나오는 중이었고 나도 어느 정도는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는 것. 결과적으론 아주 아찔하게 스쳐 지나가게 됐다. 차가운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는 나의 모습은 어딘가 극적이기까지 했으나, 실상 내 마음은 그저 ‘빨리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아찔한 순간들을 하루아침에 몇 번씩 경험해가며 병원에 도착하니 52분. 이 정도면 충분히 안정적으로 출근할 수 있는 시간이다. 병원 앞 인적 드문 길에 킥보드를 주차했다. (적당히 주차가 가능하다는 것도 전동 킥보드의 매력이긴 했다.)

  

  남은 거리를 털레털레 걸어가는데 어쩐지 부닥친 왼쪽 발목은 조금 지끈거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이 안드로메다 어디쯤으로 날아가 버린 것만 같이 그저 멍—할 뿐이었다. 전동 킥보드의 빠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생각들이 내 뒤로 영차영차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출근해서 털썩 앉았다. 그제야 복기해 보는 아침의 위험천만한 드라이브... 아찔한 포인트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지각을 면했으니 원하던 바를 이루긴 했고, 전동 킥보드라고 하는 새로운 경험에 발을 들인 것에는 만족했다. 차일피일 미뤄뒀을 걸, 발등이 불이 떨어지니 부랴부랴 어떻게든 하게 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빠름이 주는 장단에 대해서 아주 단면적으로 많은 걸 시사했던 드라이브였다. 사실 지각을 1~2분 한다고 해도 인생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빨리 가려다 사고라도 났다면 큰 문제가 된다. 어떤 일의 경중을 지금에 와서는 비교할 수 있지만 당시엔 어려웠다.


  어쩌면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었다. 눈앞에 놓인 목표를 향해 빠르게만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빠르게 가는 길이 주는 시간 단축이라는 장점은 아주 큰 게 맞다. 그러나 더 크게 보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골똘히 곱씹으며 여유를 가질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들도 있더란 말이지. 청명한 가을 하늘이라거나 아침의 기분 좋은 쌀쌀함, 킥보드를 천천히 즐기면서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것들. 그래도 물론 인생에는 속도가 분명 중요한 타이밍이 오겠지. 그럴 땐 안전벨트를 단단히 동여매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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