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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예 Aug 28. 2021

롤 모델

이게 무슨 말이랍니까…?

  요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약국에는 귀여운 직원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20대 초반의 풋풋한 그녀는 수다쟁이라, 나는 토요일마다 웃기 바쁘다. 나는 말이 많으면서도 또 없는 편이라, 이런 사람을 만나면 고맙다. 분위기에도 형태라는 게 있다면 말랑말랑한 캐러멜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랄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짬도 없이 바쁜 날도 생기곤 하지만, 아무튼 틈이 나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주로 나는 듣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칭찬에 후하고, 또 속마음을 내어놓는 데 거리낌이 없다. 20대 초반이라 그런가? 생각하다가도 그 나이 때의 나는 별로 그러지 않았던 것 같으니 개성인가 싶다. 그래도 무슨 일에도 별로 주눅 들 것 같지 않은, 그런 20대의 파릇파릇함이 느껴진다. 아직은(!) 나도 20대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어른 시늉하는 것만 같아 조금 웃기지만. 아무튼 그녀는 만난 지 두 번 만에 내게 엉뚱한 자기 고백을 해 왔다. 대뜸 큰 목소리로 그녀가 말하길…


  “약사님이 제 롤 모델이에요, 오늘부터!”


ㅋㅋㅋ…???


  저런 말은 인생에서 난생처음 들어본 말이라 그야말로 벙쪘다. 휘휘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이에요, 쌤! 내가 무슨 롤모델이야! ㅋㅋㅋ” 롤 모델은 뭐 일단… 책도 몇 권 출간하고, tv에도 곧잘 얼굴도 비추고. 그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 아니었나? 너무 생소한 얘길 듣고 나니, 어딘가를 세게 맞은 듯이 댕—하는 소리가 울리더라. 어이가 없어 너털웃음을 짓자 그녀는 재차 말한다.


  “제가 원래 롤 모델이 누구누구였거든요, 진짜! 그런데 오늘부터는 약사님이에요!”


  허허허…


  내가 뭐라고 누군가의 롤 모델씩이나 될까. 대관절 무슨 사람이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아랑곳 않고 나의 좋은 점을 마구 나열해서 나는 정말로 얼굴이 새빨개졌다. 엄밀히는 ‘좋아 보이는’ 것들이겠지만. 그런 것들은 진짜일까, 허울일까. 그런 겉보기 모습만 가지고도 나라는 사람이 롤 모델 같은 게 되어도 좋은 걸까. 아니, 그보다 그냥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스스로 너무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서 그냥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친구들이 들으면 무조건 놀릴 일이다. 가족들한테만 말해봤는데 다들 ㅋㅋㅋ 일색이었다. 너무나 민망했다.


  나와 나이차가 7살이니까, 7년이란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선생님은 선생님의 방식으로 멋진 누군가가 될 거라고 웃으며 얘기해주었다. 활달하던 그녀는 갑자기 조금은 침울해하며, 노력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 두렵단다. 그때 나는 롤 모델다운 ‘노력이 배신하진 않더라고요’ 같은 쬐~끔 멋진, (그러나 진부한) 대사를 내뱉었고… 우리는 전우가 되어 바쁜 토요일 약국 근무를 정신없이 헤쳐나갔다. (오늘도 속으로 조용히 외친다. 국장님, 분명히 한가하다고 하셨잖아요...)


  퇴근길에 혼자 속으로 생각한다. 나의 롤 모델은 누구지? 나는 생각해보면 꼭 누군가의 어떤 모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던 것 같은데.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기품 있는 어른 몇을 마음에 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짐짓 든다. ‘아, 저렇게는 늙지 말자’의 케이스는 여러 분이 떠오르는데, ‘저렇게 늙고 싶다’는 몇 분 안 되니 적극적으로 물색을 해 볼 필요성은 있군…!


  그나저나 롤 모델이라니. 이 말은 무척이나 나를 부끄럽게 만들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고, 또 그동안 열심히 살았나? 하고 조금은 머리를 쓰다듬게 만들었다. 앞으로 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게 분발하자는 조용한 결심을 마음속에 심는다. 그렇지만 역시 민망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자그마한 존재인데. 그래도 고맙습니다! 덕분에 마음에 씨앗을 하나 더 심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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