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신다.
회사원이라는 종족은 술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술을 마시는' 것이 특징이다. 술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다는 이야기다. 저녁 7시나 되서야 사무실을 나와 겨우 술병을 따기 시작했으니 아로마를 음미할 시간 따위는 없다. (소주에도 아로마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입에 오래 머물러봐야 쓰기만 할 뿐이니, 술은 목구멍으로 바로 쏟아 넣어야 한다.
앞에 놓인 술, 그리고 술을 따라주는 상사와 동료는 정복의 대상이다. 술자리에서 정신줄을 놓는 순간 근성 없는 약골로 낙인찍혀 두고두고 그 다음 술자리에서 안주거리가 되니, 편하게 회사의 술을 대하는 것은 실로 안이한 생각이다. 술은 전투적으로 마셔야 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위트 있는 농짓거리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이 회사원의 술마시기다. 술을 마시는 회사원의 정신은 추호의 휨이나 흔들림이 없이 올곧아야 한다.
그렇게 회사의 일로 한참 동안 격렬하게 술을 마시게 되면, 내가 술을 마시는 건지, 술이 나를 마시는 건지, 아니면 내 속에 들어간 술이 또 다른 술을 마시는 건지 분간하기 어렵다. 쌓인 앙금을 녹이려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돌연 술은 앙금을 녹이다 말고, 마시는 사람을 술 속에 녹여 버린다. 뱃속에 술을 붓고 또 부으면, 자정 즈음에는 앙금과 내가 한데 섞여서 이게 앙금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나였는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술자리를 통하면 앙금은 왠지 희미하게 풀어진 것만 같아서, 다시 그 위에 새 앙금을 얹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다음 날 또 술을 부어 자아와 섞는다. 그렇게 천지분간을 못하게 만들어, 오로지 일하고 술마시고 일하고 술마시고 또 일하게 하는 관성만 남기는 것이 바로 이 땅의 회사원의 술 마시기라는 것이다. 만약 이 술이 없으면 앙금이 쌓여 폭발할 것이므로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작금의 한국 직장인에게 '술 한 잔 하고 풀자'는 말은 '이 회사에서 계속 밥벌이를 하자'라는 이야기와 동격이다. 오늘의 굴욕은 맨 정신으로 견뎌낼 수 없고, 그 소화되지 않은 굴욕은 내일 아침 명치 끝 어딘가에 걸려서 일을 그르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물을 녹여버리는 이 염산 같은 술을 이 땅의 회사원들은 끊을 수 없다. 내일은 내일의 염산으로 녹여야 할 내일의 일이 또 기다리고 있으니까. 밥벌이는 그래서, 혓바닥에 진득하니 붙는 소주의 뒷맛처럼 쓰고, 또 쓰다.
술을 퍼 마시고 난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의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나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이야기하는 김훈의 글 한 편에 슬퍼했었다. 인간은 어떻게든 밥을 벌어와야 생을 부지할 수 있는데, 식물은 그저 살아 있어서 햇빛을 받기만 하면 먹고 살 수 있으니 부럽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남들이 단잠에 빠져 있는 그 시간에 억지로 잠에서 깬 사지를 버둥거려 와이셔츠와 넥타이로 목을 옭아매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애달팠다.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며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고 밥벌이를 위해 애써 나아가야 하는 아침. 그 신산스러운 나의 처지와 모양새가 스스로는 몹시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책장 너머의 김훈은 삶을 구하고자 삶을 고달프게 해야 하는 내 인생의 모순을 명징히 알고 있었다.
밥 주인이 바라는 시간에 밥 주인이 바라는 일을 해야 비로소 뜨끈한 밥술을 목구녕에 넣을 권리가 주어지니, 밥주인에게 빌어야 하는 인생은 스스로의 페이스를 기꺼이 무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깨지 않는 잠을 깨고, 지쳐 쉬고픈 손발을 애써 바삐 놀리고, 토할 것 같은 술을 뱃 속에 욱여넣어서 밥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딱 한 바퀴를 도는 나만의 시계가 있을 터인데, 밥벌이를 위해 시계의 태엽을 돌릴 권리를 밥 주인에게 내준 셈이다. 앞의 시간을 팔아 뒤의 시간을 사는 마이너스 통장 같은 인생이다. 밥 주인이 바라는 일과 인생의 시계 사이에 케미가 맞는다면 이 밥벌이의 씁쓸함이 조금은 덜할 것이나, 지나가는 하루가 고달프고 다가오는 내일이 진저리나는 것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오늘도 회사 뒷골목의 술집은 복닥거리고, 소줏병이 뒹구는 자리에는 오늘의 앙금을 다 소화하지 못한 김 과장 박 대리가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의 밥벌이에 대해 세상 무너질 듯 진중히 토론한다. 어차피 오늘의 일과 내일의 일이 다르지 않음을 진작에 알고 있는 그들의 씁쓸함은 밥벌이와 술잔 사이를 왕래하다가 건배사 몇 번과 함께 뱃속으로 침잠하고, 그제서야 앙금은 조금씩 녹아내린다.
그 밥벌이의 전우들은 여기서 짠, 저기서 짠, 술병을 겨누며 방황하다 기어코 내 빈 술잔으로 달려들었다. 한 잔 해야지 - 라는 권유 같은 도발과 함께 빈 잔 가득 맑은 소주를 따라준다. 벌건 얼굴로, 나도 잔을 부딪치고 술을 털어넣었다. 입안에 남은 소주기운을 지우려 침을 꿀떡 삼켰는데, 씁쓸하게 소주가 섞인 침은 마지막 엉겨붙은 고민과 앙금을 어거지로 붙잡고 뱃속으로 쑥 내려가고, 목구멍은 내일의 밥벌이를 예비하며 깔끔하게 단장을 마쳤다. 술집 벽에 붙은 포스터에 소주잔을 든 아이돌 가수는 '뒷맛이 깔끔해 !'라며 윙크를 던진다. 인상을 팍 쓰고 혓바닥을 내밀며, 나는 반쯤 엄살을 섞어 휘휘 손사래를 치고야 말았다.
- 캬아... 쓰다, 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