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간의 1막을 마친 콜드플레이, 그 두 번째 이야기
콜드플레이의 결성부터 3번째 정규 앨범 <X&Y>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이전 글 A Head Full of Dreams vol.1에서 이어지는 콜드플레이 20년 역사의 1막 2장입니다. 콜드플레이라는 밴드의 스토리가 궁금하시거나 이 글을 조금 더 재밌게 읽으시려면 이전 글을 선독하시면 더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메이저 데뷰 이후 뉴 밀레니엄의 기수이자 시대의 명반을 발표한 이들은 두 말할 필요 없는 슈퍼스타가 됐습니다. 이때 저는 '지나치게 뛰어나다'라고 평해도 부족함 없을 2집 <A Rush of Blood to the Head>가 오히려 그들에겐 앞으로 넘지 못할 커리어의 정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브라이언 이노를 만나다
전작 <X&Y>는 상업적으로 거대한 성공을 거뒀습니다. 밴드의 사운드도 이미 작곡과 가사, 편곡, 레코딩 등 모든 영역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멤버들은 그 완성도에 100% 만족을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뉴 밀레니엄의 혼란스럽고 멜랑콜리한 정서에 조응해온 이들은 <Fix You>, <Politik>과 같이 고조되는 폭발성과 온기를 뿜는 곡들도 연주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때까지 콜드플레이의 시그니처는 '우수 어린, 생기가 없는, 다소 차가운' 사운드였지요. 그들에게 거대한 인기를 가져다준 이 정체성이 동시에 틀이자 벽으로 작용했다는 평도 적지 않았고, 밴드 멤버들 역시 이 지점에서 고민이 깊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더라도 자력으로 그 변화를 이뤄내긴 어려운 일이죠. 이들은 변화의 비전을 위해 새로운 프로듀서로 만나게 됩니다.
브라이언 이노. 록시 뮤직(Roxy Music)의 키보디스트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앰비언트 뮤직의 선구자이자 전설. 일찍이 U2부터 시작해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 데이먼 알반(Damon Albarn) 등 다양한 색깔을 지닌 아티스트들 스스로가 벗어나지 못했던 기존의 관성을 깨고 새로운 한 걸음을 뗄 수 있도록 비전을 제시해온 프로듀서.
밴드는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는 최고의 적임자를 만났습니다. 이미 브라이언 이노가 그들의 네 번째 앨범의 프로듀서였음을 알고 있었어도, 영화 <A Head Full of Dreams>에서 콜드플레이가 브라이언 이노를 영입했다는 대목에서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감탄이 나왔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잘 알고 사랑하는 사운드를 지닌 밴드가 새로운 색깔을 시도하는 것은 큰 용기와 높은 난이도를 요구하고, 도전하더라도 좋은 결과에 이르지 못할 수 위험도 또한 높습니다. 안 시도해본 장르가 없는 변신의 귀재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도 모든 시도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지요. U2 마저도 기존과는 다른 사운드를 시험했던 90년대 중후반의 앨범들은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습니다. (U2의 전체 역사에서 <Zooropa>, <Pop>는 이질적인 앨범이긴 하지요. 개인적으로는 이 두 앨범에서 시험했던 사운드와 비트가 이후 U2에 더 좋은 거름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일급 조타수는 난제로 향하는 길을 어떻게 안내했을까요. 브라이언 이노는 멤버들과 함께 레코딩 스튜디오를 벗어나 자연의 소리를 담거나, 스페인 성당의 종소리를 함께 울리며 녹음했습니다. 멤버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고함을 담았습니다. 비단 악기가 아닌 갖가지 사물을 두들겨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체험했습니다. 브라이언 이노가 제시한 방향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로의 접근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정제된 수준의 리듬 위에서 차분한 무게를 지녔던 밴드는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확장해나갔습니다. 브라이언 이노는 그들에게 새 앨범의 악곡의 지향점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현실 세계의 새로운 소리를 멤버들에게 체험시켜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옷을 입도록 도왔지요. 브라이언 이노라는 프로듀서의 대단함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영화 <A Head Full of Dreams>에는 콜드플레이 멤버들이 브라이언 이노와 함께 새로운 소리를 체험하고 작업해나가는 매우 즐거운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멤버들은 과거 앨범들을 작업할 때의 심각한 중압감에서 벗어나 즐거움과 웃음으로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2008년 4월, 밴드의 새 싱글 <Violet Hill>이 발매됐는데, 들어보고 난 후 한 동안 놀랐습니다. 분명 콜드플레이의 노래가 맞는데, 이전과는 다른 요소가 너무 많았거든요. 묵직하고 선동적인 비트, 퍼지(Fuzzy) 하고 강한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어둡고 결연한 악곡의 분위기, 무엇보다 여전히 섬세하지만 유약한 감정선은 없는 드라이하면서도 뜨거운 느낌의 보컬. 은유 가득한 반전의 메세지를 담은 가사까지 모두 새로웠습니다.
당시 <Violet Hill>에 대해 주변에서는 호불호가 많이 갈렸습니다. '콜드플레이가 변했다', '뭐냐 이 음침한 노래는', '꽂히는 멜로디가 없다' 등의 반응이 꽤 많았습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콜드플레이의 새 사운드는 대중들에게 '낯설다'는 느낌을 확실히 선사했습니다. <Violet Hill>은 이후 나올 네 번째 정규 앨범 중에서도 가장 날카롭고 강렬한 감정선을 지닌 트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2008년 5월, 아마도 콜드플레이의 새 싱글의 티저로 추정되는 애플의 iTunes 티저 클립이 공개됐습니다. 아직도 처음 보고 받았던 충격이 생생한 단 30초짜리 영상.
30초 후에 두 가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이 노래의 제목은 <Viva La Vida>구나. 두 번째는 아, 엄청난 노래가 나오겠구나!
Viva La Vida
곧이어 정규 발매된 새 싱글 <Viva La Vida>는 그 노래가 어떤 곡인지를 설명하는 게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콜드플레이라는 밴드의 이름과 동등한 명함의 지위를 지닌 노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노래. 아니, 콜드플레이를 모르는 사람도 몇 번씩은 들어봤을 그 노래. (TV와 라디오, 인터넷의 공기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이 이 노래를 듣지 않는 것도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심플한 코드와 복잡하지 않고 직선적인 구성의 이 4분짜리 노래는 콜드플레이가 구 시대의 성벽을 허물고 새 시대의 개선문으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승전가와 진배없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벅차오르는 리프와 지축을 흔들듯 때려대는 북과 종소리, 이를 이끄는 선명한 멜로디의 보컬과 멤버들의 합창까지. 그들이 들고 나온 새 시대의 개선가는 마침내 빌보드 핫 100 차트의 넘버원을 탈환하고 전 세계 차트에 헥토파스칼 킥을 날렸습니다.
이후에, 모두가 아는 것처럼, <Viva La Vida>는 전 세계의 무대에서, 광장에서, 개인과 군중이 모여 뜻을 이루고 기쁨을 나누는 순간들에 함께해왔습니다. 비단 콜드플레이만의 것이 아닌 만인의 승전가가 된 이 노래는 무수한 히트곡을 가진 콜드플레이의 공연에서 팬들이 가장 기다리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2017년 4월의 서울에서 <Viva La Vida>의 순간을 함께했던 환희를 잊을 수가 없네요.
그리고 그들의 네 번째 정규 앨범이 발매됩니다.
프랑스 화가 들 라클 루아의 1830년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바탕으로 <Viva La Vida>가 쓰인 강렬한 재킷은 밴드의 새로운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선포하는 멋진 상징이 아닐까 합니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이 그림의 정서와 색감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이전 앨범까지는 멤버들이 별다른 콘셉트와 개성 없는(칙칙한 루저) 아웃핏을 보여줬다면 <Viva La Vida>의 멤버들은 프랑스혁명에 가담한 민중의 전투복을 연상시키는 콘셉트의 아웃핏을 선보였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밴드 멤버들의 아웃핏은 그 자체로 앨범의 콘셉트를 투영하는 하나의 구성 요소로서 적극적인 기능을 합니다. 이 역시도 비주얼 아트의 역량을 보유한 브라이언 이노가 이끈 길이었을까요?
가시적인 콘셉트 소화력이 업그레이드된 것도 중요하지만, 콜드플레이는 마침내 사운드의 질적이고 양적인 발전을 이루고야 말았습니다.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 앨범은 크리스 마틴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곡의 작법도, 정서도, 사운드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도, 연주도 이 전의 앨범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깨어질 듯 불안하고 약했던 정서를 담아 내뱉었던 크리스 특유의 팔세토의 흔적도 적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가사가 없는 킥오프 트랙 <Life in Technicolor>와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트랙 <Cemeteries of London>에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서서히 고조되는 신시사이저 사운드에 하나씩 더해지는 밴드의 연주는 이전에 듣기 어려웠던 정력적인 에너지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크리스의 힘차고 밝은 코러스가 등장하면 '아, 이번 앨범은 이런 힘이 넘치는 밝은 콘셉트구나'라는 걸 직감하게 되지요. 첫인상이 확신으로 굳어지기도 전에 이 짧은 곡은 마지막 순간에 표정을 바꿔 순식간에 무겁고 어두운 공기의 음계로 전조를 합니다. 그렇게 바로 이어지는 <Cemeteries of London>은 기존의 콜드플레이의 사운드에서는 듣지 못했던 다채로운 소리들이 음산하고 냉기 서린 분위기를 직조하는 독특한 매력의 곡입니다. 불편한 노이즈와 피아노, 신시사이저, 드럼, 어쿠스틱 기타, 박수 소리, 합창, 아득한 공간감의 기타와 어둡고 불안하지만 망설임의 기색이 없는 크리스의 목소리의 조합은 그들이 그간 새로운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소리의 조합을 고민했는지에 대한 증표와 같습니다. 또한 "I see God come in my garden but I don't know what he said.", "There's no light over London today."와 같은 가사에서 드러나는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는 킥오프 트랙인 <Life in Technicolor>에서는 예측하지 못했던 심연이지요. 이 앨범의 이름이 그저 <Viva La Vida>가 아니라 <or Death and All His Friends>가 붙는 데는 앨범 전체에 서린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생과 사의 명과 암의 정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앨범들 대비 더 치열한 다이내믹스가 느껴집니다.
시대의 명곡인 <Viva La Vida> 말고도 이 앨범에는 좋은 노래로 가득합니다. 독특한 리듬과 분위기로 어떤 특정 장르의 곡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Lost!>와 잔잔하게 시작하여 스케일 업해나가고 결국 앨범의 킥오프 트랙과 대구를 이뤄 마무리하는 대곡 <Death and All His Friends>와 같은 곡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Lovers in Japan/Reign of Love>가 앨범의 또 다른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피아노 사운드에 견실한 드럼과 기타가 함께하는 <Lovers in Japan>는 듣는 재미만으로도 훌륭합니다. “Soldiers you've got to soldier on sometimes even right is wrong"이라는 진실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더니, 미니멀한 사운드로 '무릎을 꿇고 겸허한 자세로 사랑에 이끌려가는 마음'을 노래하는 <Reign of Love>가 곧바로 이어집니다. 한 노래 안에서도 삶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담겨있어 텍스트로서의 ‘읽기’도 즐거운 노래입니다.
그러고 보면 <Viva La Vida> 역시 모순적인 미학의 노래입니다. 노래의 화자는 세상을 지배했지만 몰락한 폭군이지만, 노래의 제목은 폭정에서 해방된 군중의 입장인 <인생 만세>지요. 길거리를 청소하는 처지가 된 몰락한 왕은 과거 본인이 모래와 소금의 성에 살았음을 깨닫습니다. 누구라도 그 권좌에 앉는 한 진실함으로 세상을 통치할 수 없으리란 토로를 하지만 군중과 혁명가들은 그저 통치자의 죽음을 원할 뿐이지요. 때문에 이후 어떤 후임자도 피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역설이 담긴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밴드의 연주는 다채로워졌습니다. 다양한 노이즈와 효과음을 오버더빙하여 만들어낸 풍부한 사운드와 비트는 듣는 기쁨을 선사했지요. 이 앨범에서 밴드의 호흡은 최고입니다. 전에 없이 많은 악기와 사운드가 쓰였음에도 네 사람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주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잡하고 낯선 사운드를 구현해낸 기반은 역시 팀웍에 있었지요.
콜드플레이는 시대의 담론을 노래하기보다는 개인의 내면과 세계관에 대해 집중하는 화자들이었고,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 앨범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는 개인을 향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시선은 그들이 연주하는 사운드만큼이나 더 넓어졌고 깊어졌습니다.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지녔던 뮤지션이 이렇게 횡적이고 종적인 발전을 성공적으로 거둔 사례는 다시 생각해도 많지 않습니다. 이런 앨범에 전 세계의 차트와 주요 시상식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51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Viva La Vida>로 Song of the Year를 수상하는 등 3개 부문을 수상하고 그 외에도 수많은 수상과 영국 역사에 남을 판매고를 거둡니다. 이미 거대한 성공을 이뤘던 영국 출신의 락 밴드는 그렇게 더 큰 영광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밴드는 미공개곡들과 새로운 버전으로 재구성한 기존 앨범 곡들을 엮은 <Prospekt's March EP>를 출시합니다. 본 앨범에서는 제이지(Jay-Z)의 피처링으로 <Lost+>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뉴욕 힙합의 대부와의 컬래버레이션 이후 콜드플레이는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를 시도하게 됩니다. 보컬 버전의 <Life on Technicolor ii> 같은 싱글도 팬들에게는 선물 같은 트랙이었고, 밴드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확실한 이정표이기도 했습니다.
밴드는 <Viva La Vida Tour>도 성공적으로 마칩니다. 콘셉트를 아웃핏으로 승화했던 것처럼 밴드의 콘서트 연출도 한 층 업그레이드됐습니다. 영상, 색종이, 의상, 조명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앨범의 콘셉트를 라이브 공연이라는 하나의 플랫폼에 담아내는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Coldplay Live>는 거대한 라이브 쇼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요란스럽지 않고 쿨했던 밴드는 <Viva La Vida or Death and All His Friends>를 통해 열정적으로 뛰고 외치며 연주하는 아이콘으로 거듭났습니다. 전작인 <X&Y> 때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HOT-PLAY'의 모습으로 변신한 이들은 그 다음으로 어떤 길을 이어갔을까요.
<다음 글에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 본 글에 인용된 에피소드는 영화 <A Head Full of Dreams>와 영문판 Wikipedia, <Rolling Stone> 매거진 등에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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