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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보 Jul 08. 2019

위빳사나 수련이 이런 거라고요??

감각의 소용돌이

DAY 4가 되자 그간 인중 부위에 두었던 주의집중을 정수리로 가져가 보라고 한다. 정수리라고 하면 대충 머리 꼭대기 부분이겠거니 싶지만 사실 어디가 머리 꼭대기인지 정확하게 짚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련생들이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정수리가 여긴가??? 아니 조금 앞인가???? 그 옆인가?? 하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수리가 어딘지 찾느라 어리버리 타는 와중에 정수리에서 어떤 감각이 느껴지는지 객관적으로 관찰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감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여기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열감일 수도 있고 냉감일 수도 있으며 바람감(이런 말이 있습니까???)일 수도 있고 찌르는 듯한 통증일 수도 있으며 가려움일 수도 있고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일 수도 있으며…”

등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여하의 감각을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원래 이 멘트가 대단히 긴데 시간이 흘러 까먹어서 아쉽네요…)


그 후에는 주의 집중을 정수리에서 두피 전체로 확대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얼굴, 상완부, 팔꿈치, 전완부, 손바닥, 손끝 이런 식으로 온 몸을 서른 몇 개의 부위로 나눈 다음 차례차례 하나씩 짚어가며 각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부분부분 단계단계(영어로는 part by part… piece by piece…)’ 관찰해보라고 한다.


그런데 녹색으로 쓴 내용을 몸의 한 부위에서 다른 부위로 넘어갈 때마다 매번! 똑같이! 고스란히! 반복하는 게 아닌가. 몸 전체를 서른 몇 개 부위로 나누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같은 설명을 서른 몇 번 들은 셈이다. 뭘 느끼라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 상황에 한글자도 안 빼먹고 똑~같은 멘트를 계속 이어서 듣고 있자니 따분하고 지루하고 슬슬 짜증까지 나려고 하는 찰나에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도 같은 말을 계속 하다보니 그쪽(=오디오를 녹음하신 분)도 좀 지겹고 머쓱했던지 설명 도중에 나오는 “부분부분 단계단계”를 은근슬쩍 “단계단계 부분부분”으로 바꿔서 말하는 거였다. 그렇게 “단계단계 부분부분”을 다섯번 정도 말하고는 다시 “부분부분 단계단계”로 돌아갔다ㅋㅋㅋㅋㅋ 휴… 뭐 하자는 거죠??


아무튼 그렇게 DAY 4 명상시간에는 같은 훈련을 반복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도대체 어떤 감각을 느끼라고 하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는데 저녁 법문시간에 예를 들어 설명하는 걸 듣고서 비로소 주의집중한 부위에서 ‘어떤’ 감각을 느끼라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고엔카 법사가 든 예시는 이런 것이었다. 아주 더운 날 냉방이 전혀 되지 않는 개인명상실에 들어가 위빳사나 수련을 시작한 초보자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감각을 느끼라고요? 나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겠는데요??” 라고 하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 누가 봐도 찌는 듯한 더위를 느끼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 위빳사나 명상에서 주의집중을 기울인 신체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란 것은 정말로 직관적인 ‘감각’ 그 자체를 말하는 거였다. 아주 조용한 곳에서(=청각을 차단), 눈을 감고(=시각을 차단) 촉각에만 집중할 때 느껴지는 것. 예를 들면 피부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거나 까슬한 옷의 촉감, 노출된 피부에 닿는 공기의 선선함, 묶은 머리카락의 무게감과 당기는 느낌, 양반다리를 하고 오래 앉아있으면 머지 않아 찾아오는 발저림 같은 것 말이다.


법문을 들은 후 예민하게 집중을 해보니 그다지 어렵지 않게 신체 각 부위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각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정수리나 두피에선 머리끈으로 묶은 머리의 살짝 당겨지는 느낌과 머리카락의 무게(당시 긴 머리여서 무시 못할 무게감이 있었음), 그리고 두피에서 발산된 체온이 머리카락 때문에 밖으로 발산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열감 같은 것이 느껴졌고 어깨와 등에선 제법 묵직한 후드티의 무게감과 피부에 옷감이 닿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그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라고 한다. 흠…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고요? 여기서 강하게 브레이크가 걸렸다. 가부좌를 틀고 오래 앉아 있으면 찾아오는 발저림은 자세를 바꾸기 전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두피에서 느끼는 머리카락의 무게감 또한 머리를 자르거나 밀기 전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뭐가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거지?


그리고는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지듯이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것임을 깨우쳐라 따라서 일일이 집착하거나 매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고 말한다. 네? 저기요 그런데 일단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지질 않는데요…??


내가 볼 때 '감각'이란 건 개체의 생존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고 특히 그 강도가 강한 감각, 그러니까 숨이 멎을 듯한 통증이라거나 타는 듯한 뜨거움이나 얼어붙는 추위 같은 것들은 생명에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강렬하게 느끼도록 설계(라고 쓰고 진화라고 읽는다… 전 창조론자가 아니니까요ㅋ)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특정한 감각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응분의 액션이 있어야 한다. 손이 시리다면 장갑을 끼거나 난로에 손을 갖다 대야 추위가 사라지고, 벌레가 물어서 가렵다면 약을 바르거나 긁어서 해결해야 한다.


아무튼 나는 이 지점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버렸다. 저녁 법문 때도 딱히 여기에 대한 설득력 있는 보충설명은 나오지 않았다. 2~3일에 한 번 정도 지도 선생님 격의 중년 남성이 명상시간 도중에 수련생들을 6명씩 앞으로 불러 명상이 잘 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한 명씩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를 틈타 물어보기로 했다.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지켜보라고 하는데요. 감각이 과연 나타났다 사라지는 건지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자세로 계속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린데, 제가 자세를 바꿔주지 않으면 그 다리가 저린 감각은 사라지질 않지 않나요?”  


지도 선생이라는 사람은 당황스러워 하며 “엄…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건데… 음… 계속 관찰을 하다보면... 음... 다리가 저려서 집중이 흐트러질 경우에는 자세를 바꾸셔도 좋습니다.” 같은 터무니 없는 대답을 해왔다. 내 생각엔 위빳사나 수련 과정에서 충분히 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의문인데 여기에 대해 마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 대답하는 태도가 놀라웠다.


이때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같이 앞으로 나가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얘기한 다른 다섯 명의 수련생들 중 그 누구도 이런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더라는 거였다. 촉각을 통해서 실제로 느껴지는 감각들이 아니라 위에서 녹색으로 쓴 내용에 있는 '감각'들 그러니까 "머리 끝에서 약간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느껴져요" 라거나 "인중 부분이 살짝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한데 긴가민가 하고요" 등 명상을 통해서 새롭게 느끼는 특별하고 비일상적인 감각에 대해서 얘기를 늘어놓곤 했다.


혼란스러웠다. 집요하게 캐물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리한 상황에서 분위기를 좆창내기는 좀 부담스러워서 일단 접었다.


그 이후로 DAY 5, DAY 6, DAY 7의 명상수련은 DAY 4에서 했던 부분부분 단계단계 감각 지켜보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DAY 4에 온 몸을 서른 몇 개의 부위로 나누었다면 그 다음엔 좌우 대칭(……;;)으로 감각 관찰을 한 다음, 온 몸을 머리에서 발 끝까지 한 번에 쓸어 내리면서 관찰하게 하고, 그 이후에는 발 끝에서 머리 끝까지, 역방향으로 단번에 감각을 느껴보라고 한다. 이게 모죠???


DAY 6를 기점으로 나는 아예 관찰자의 포지션으로 돌아서기로 했다. 고엔카 법사는 법문을 통해 위빳사나 수련은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자 과학에 기반했다고 강조한다.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체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깨닫는 것이 바로 위빳사나 명상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감각이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납득하지 못하면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DAY 5쯤에 그만두고 퇴소를 할까 하는 고민도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호불호가 확실하고 아닌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 탓에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중도에 그만두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로 인해 손해를 너무 많이 봐온 터라 이번에는 납득이 가지 않아도 끝까지 있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위빳사나 명상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르고 오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물론 Day 10까지도 그런 깨달음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말이다(또르르).  


‘과학적’으로 몹시 당황스러운 얘기는 사실 따로 있었다. 법문 시간에 고엔카 법사는 세상 모든 것은 아원자입자인 깔라빠라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뭐… 분자나 원자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깔라빠에 물, 불, 흙, 바람의 4가지 요소가 있고, 각 요소들이 결합해 그 물질의 성질을 결정한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무슨 땅! 불! 바람! 물! 마음! 을 외치는 캡틴플래닛도 아니고 이게 무슨 안아키 같은 소리죠?


가루로 된 시멘트에 물을 부으면 딱딱하고 무거워지는데 그게 흙의 요소가 물의 요소와 만났기 때문이라는 둥(네… 물의 무게가 더해졌으니 무거워졌겠지요…) 정신이 아득해지는 얘기도 나왔다. 비록 문과 출신이지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온 몸을 위로 훑고 아래로 훑으며(……;;) 감각을 지켜보는 수련은 DAY 9까지 이어졌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나 심화된 수련법 같은 것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도리어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반전(?)의 순간이 찾아 왔다. 9일째 저녁, 그러니까 위빳사나 수련 메인 코스가 다 끝난 다음 법문 시간이었다.


고엔카 법사가 수련 초반에 내가 추측했던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호흡을 몸이 기억하도록 반복적으로 훈련함으로써 일상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말이다. 와… 뭐 하자는 거죠? 결국 설명 안되는 부분을 빼면 남는 건 그것 뿐이잖아!!! 혼란스러움과 빡침과 허무함이 손에 손을 잡고 가부좌를 튼 내 주위를 강강술래 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위빳사나 명상의 본 과정이 막을 내렸다. 진짜로 코스가 끝나는 날인 DAY 10에는 메따 바와나 명상이라는 새로운 명상법을 배웠는데 이 수련법(의 황당함과 허무함……)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에서 자세히 설명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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