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여름
흐린 날의 여름은 대부분 습도가 높다. 몸도 마음도 축축해져서 어항 속 물고기가 된 기분이다. 습도가 높은 만큼 불쾌지수도 높기 때문에 평소보다 예민해지기 쉽다. 그래서 최대한 조심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뾰족한 말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출근길부터 예민함을 가득 안고 출근을 하다 보면 으레 하는 인사말도 듣기 싫어질 때가 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 같으면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말도 하고 속마음도 말과 동일했을 텐데, 이런 날이면 말로는 좋은 아침이라고 하면서 속마음으로는 '좋은 아침? 조오오은 아치이임? 이게 어떻게 좋은 아침이야? 불쾌한 아침이지!'라고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직장인에게 좋은 아침이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연차 쓴 날이 아닌 이상 좋은 아침이란 걸 경험할 수가 있기나 한가? 아무튼 이런 날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서로 마음 상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에 서로 업무를 주고받을 때 최소한의 말만 해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날 사람이 적은 곳에 가면 흐린 날도 꽤나 멋들어진다.
비가 한바탕 쏟아지기 전의, 축축하고 눅눅하면서도 쌉싸름하고 시원한 향. 이 향이 여름에 있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살짝 젖은 풀냄새가 코 끝을 맴돌면 꿉꿉하고 눅눅했던 마음이 살짝 시원해진다. 더운 공기에 비해 여름의 향은 싱그럽다. 맑은 날에는 햇빛냄새가 가득한데 흐린 날에는 풀냄새가 가득하다. 물론 이 풀냄새는 맑은 날, 밤에도 가득하다. 여름밤에 산책을 하면 기분이 좋은 이유 중 하나다. 은은하게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고막을 채우고, 낮동안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식으면서 강해진 쌉싸름한 풀냄새가 폐 속을 가득 채운다.
다시 돌아가서 흐린 날 사진을 찍으면 눅눅하면서도 풀냄새가 가득한 여름을 담을 수가 있다. 그렇기에 물밖에서 아가미를 뻐끔거리는 물고기처럼 호흡을 내뱉으면서 땀을 비 오듯이 흘려가면서도 걸으면서 사진을 찍는 걸 포기할 수가 없다.
흐린 날의 여름의 색은 색들이 더 어둡고 깊은 느낌을 준다. 맑은 날의 여름이 색을 또렷하게 내뿜는 것과는 반대의 느낌을 준다. 그래서 맑은 날의 여름은 온 생명력을 불태우고 있는 듯 보이고 흐린 날의 여름은 그 생명이 소진되어 가는 듯 보인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지만
마음은 여름으로 범벅이 되는 날
흐린 날에만 담을 수 있는 여름의 향과 색감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
그러나 점점 여름은 맑든 흐리든 높은 불쾌지수를 자랑하는 계절이 되고 있다. 여름 내내 예민한 성격으로 사는 것 같지만 내 기분에 의해 태도가 좌지우지되면 안 되니깐 주기적으로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하나쯤은 떠올려야 한다. 좋아하는 여름 책이나 영화 또는 노래, 풍경 등 중 하나 정도는 여름을 좋게 만드는 게 있을 테니 추억으로 미화된 여름을 생각하면서 올여름도 무던하게 잘 버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