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사람 - 20대 초반

더 넓은 세상은 내 밖에 있다고 믿었다

by The Other Game


돌아보면 그랬다.


나는 항상 '다음'을 준비했다. 지금의 만족보다는 그 다음을 위해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중에 내가 뭘 하고 싶을지 모르니, 여유가 있을 때마다 갖출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준비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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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세상은, 내 밖에 있다고 믿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토익을 준비했다. 당장 어디에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해두면 나쁠 게 없었기에 했다. 친하게 지내던 동기는 나를 보며 '참 피곤하게 산다'고 했고, 나는 그 친구가 '너무 쉽게 세상을 산다'고 생각했다.


목표한 점수를 달성할 즈음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자퇴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자퇴는 절대 안 된다는 아빠의 불호령, 그리고 나 스스로의 두려움으로 교환학생만이 이 학교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자퇴하면 쫒겨날 것 같았다


이번에는 토플이었다. 2학년이 되던 해, 학교에 가지 않고 휴학을 했다. 지금은 회사도 덥석 그만두는데, 그때는 한 학기 휴학도 큰 모험처럼 다가왔던 것 같다. 반년 동안 하루 4시간 자며 공부했다. 그 시기가 아마 가장 몰입했던 때일 것이다. 하루에 토플 단어 200개씩 외우고 다음 날 아침 쪽지시험을 봤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200개의 단어가 주어졌다. 그렇게 매일 반복이었다.


당시 고속터미널역 근처 학원에 다녔는데, 스파르타식 공부방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수업과 자습을 하다가 집에 보내주는 식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단어를 달달 외우다가도 안되면,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아파트 앞 놀이터를 몇 바퀴나 돌며 외워댔다.


15a941de00c31afc0.jpg 먹으면 외워지는 암기빵


그렇게 교환학생에 붙었다. 그것도 내가 꿈꾸던 학교였다. 뿌듯했다. 지금은 신경도 안 쓸 작은 이유로 미워했던 사람들에게 이긴 듯한 기분도 들었다.


Lillis-Business-Complex-design-installations-one-use.jpg 꿈에 그렸던 University of Oregon



교환학생, 첫 해외 살기


이제는 미국에 갈 준비였다. 학생비자로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또다시 준비했다. 미국에 가면 교내 수영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 미리 한국에서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땄다. 한여름, 잠실과 인천을 오가며 눈물 흘려가며 수상훈련을 했다.


자격증을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라이프가드를 뽑는 테스트에서 유일한 동양 여자로 참여했다. 랜덤으로 배정된 파트너가 물에 빠지면, 각종 인명구조 스킬을 써서 구해낸 다음, 지상으로 올리는 것이 미션이었다. 나보다 몸이 두 배 정도였던 그녀를 아등바등 끌고 왔지만, 결국 물 밖 지상으로 끌어올리지 못해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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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냥 공부하고 여행하며 일 년을 보냈다. 영어는 기대만큼 늘지 않았고, 다시 한국의 학교로 돌아가기 싫었다. 유학 전환을 하기엔 여건도, 내 의지도 여의치 않았다.




클럽메드, 첫 해외 근무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또 떠날 준비를 했다. 아르바이트를 샅샅이 뒤지다, 우연히 항공권과 숙식, 소정의 월급까지 주는 자리를 찾았다. 클럽메드라는 글로벌 리조트의 G.O 포지션이었다. 재학생 신분이라 자격요건은 부족했지만, 라이프가드 자격증 덕분에 합격했다('다음'의 사람으로서 뿌듯했던 순간이었나).

G.O는Gentle Organizer란 뜻으로, 전세계 클럽메드 리조트에 상주하며 최고의 휴가를 위해 고객들의 편의를 돕는 클럽메드 직원을 말한다. 특히 G.O는 고객의 휴가 프로그램을 리드하는 일종의 연출가로서 단순한 클럽메드의 리조트 상주 안내원이 아니라, 낮에는 스포츠 강사, 요리사, 바텐더 등 각각의 전문분야에서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저녁에는 각종 쇼에 등장하여 세계 각국의 고객들에게 즐거움과 추억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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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푸켓 클럽메드


그렇게 태국 푸켓으로 발령을 받아 라이프가드로 일했다. 아름다운 휴양지,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놀며 일하듯 즐거운 날들을 보냈다. 영어도 늘고 친구들도 사귀고 맛있는 태국 음식도 밤낮없이 실컷 먹었다. 신세계 투성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나를 챙겨주는 친구들을 사귀고, 나도 누군가를 처음으로 가족처럼 여기며, 걱정하고 위로하고 축하해 가며 그 가을을 보냈다.


그러던 중, 당시 푸켓 클럽메드를 총괄하던 촌장님이 몰디브로 발령을 받으며 같이 갈 팀을 꾸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다. 늘 그 다음을 고려했기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기회면 무엇이든 환영이었다. 다행히 나까지 포함되어 팀이 꾸려졌다.




몰디브 외노자로 살아가기


몰디브에서는 익스커션 세일즈와 투어 가이드로 일했다. 리조트 내 투어 패키지를 판매하고 고객들을 인솔해 경비행기 투어, 스노클링 투어, 로컬 섬 투어, 돌고래 투어 등을 진행했다. 매일 바다에서 수영하다 보니 한 달도 안돼서 새까맣다 못해 초콜릿처럼 탔다.


나의 일주일은 보통 이렇게 흘러갔다.

12명 정도 탈 수 있는 경비행기를 타고 무인도에 내려 고객들과 랍스터를 구워 먹고 스노클링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또 다른 하루는 저 멀리 바다로 나가 돌고래들을 만났다. 그다음 날은 오피스에 앉아 고객을 응대하고 서류 업무를 처리했다. 주중 하루는 휴일이라 방에서 밀린 잠을 자거나, 수도 말레 섬에 나가 간단히 쇼핑을 하거나 시내를 걸었다. 다만 말레로 가는 보트에 빈자리가 있어야만 섬을 나갈 수 있었기에, 고객으로 보트가 가득 찬 날에는 꼼짝없이 섬에 묶여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게 은근히 큰 고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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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디브 카니 클럽메드


현지 투어팀과 매일 함께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그들의 삶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미래의 걱정보다 오늘의 즐거움과 만족을 더 소중히 여겼다. 오늘 잡은 랍스터가 살이 통통하면 환하게 웃었고, 저 멀리 먹구름이 몰려오다 이내 사라지면 신나서 춤추고 노래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행복한 미소가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림6.jpg 몰디브를 떠올리면 공허함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내 만족과 행복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어느 날부터 보트 위에 앉아 한국을 그리워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바다 저 아래 만타 떼가 몰려와도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고, 돌고래가 단체로 점프를 해대도 그저 고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만 남았다. 정든 고객들이 떠나는 날에는 허전함과 냉소가 가슴에 밀물처럼 찼다가 썰물처럼 빠지길 반복했다.




20대 초반을 떠올리면 공허함이 크다


ef3208c78cb7297b84bbb9c16bd7e3a1_res_a.gif 공허함이 파도쳤다


문득 내 졸업과 취업이 걱정됐다. 밤마다 나와 해변에 앉아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봤다. 물에 홀리듯 마음이 울렁거리고 우울감이 올라왔다. 한국이 궁금했다. 그곳의 아름다움이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사표를 쓰고 짐을 챙겨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 해는 지금 생각하면 열병 같았다. 내 정체성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학교로 돌아가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더 많은 걸 배우고 경험하러 나간 세상 밖에는 내가 찾던 답이 없었다. 답이 어딘가에는 있는지 알았다. 보물 찾기와 같은 건 줄 알았다.


보물을 끝내 찾지 못한채, 푸켓과 몰디브 바다를 헤엄치던 제이미는 취업을 걱정하는 또 한 명의 대학생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나의 20대 초반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의 사람〉은 인생의 전환과 성장을 다루며,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의 시간을 따라가는 연재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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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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