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우주소설 『삼체』를 읽고

by Muswell

(이 글에는 『삼체』 3부작의 내용이 곳곳에 포함되어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삼체』 3부(사신의 영생)를 열면 앞부분에 아래와 같은 연대 대조표가 등장한다.


위기의 세기: 서기 201x~2208년

위협의 세기: 서기 2208~2270년

포스트위협의 세기: 서기 2270~2272년

전송의 세기: 서기 2272~2332년

벙커의 세기: 서기 2333~2400년

은하의 세기: 서기 2272~알 수 없음

DX3906 성계의 블랙도메인 세기: 서기 2687~18906416년

647호 우주의 시간선: 서기 18906414년에 시작


이게 무슨 암호 같은 숫자의 조합인가 싶을 수도 있다. 이미 2부까지 읽은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3부를 읽기 전에 이 표를 봤을 때 들었던 생각은 '이놈의 미친 스케일은 도대체 어디까지 커지는 거지?'였다. 공간적으로도 우주를 자유롭게 넘나들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이 3부작을 '대하우주소설'로 분류하기로 했다.


사실 세 권의 분량을 다 합치면 2000쪽에 가까울 정도로 길기 때문에 이 글에서 『삼체』 3부작의 내용을 요약하기는 불가능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유튜브 '주펄' 채널의 '삼체 설명회' 영상을 우연히 봤는데, 상당히 자세한 수준에서 내용을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명 웹툰 작가답게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충분히 책 읽기를 대체할 수 있는 영상이라고 보지만 대신 통합본의 길이가 무려 3시간 44분이므로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겠다.


삼체문제는 원래 중력으로 상호작용하는 3개의 천체가 서로의 궤도에 영향을 미칠 때 미래의 위치와 운동을 예측하는 문제로 일반적인 해가 존재하지 않는 문제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태양계에서 4.3광년 떨어져 있어 가장 가까운 항성계인 센타우루스 자리가 세 개의 항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이 항성계의 행성을 삼체세계로,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외계인들을 삼체인이라고 부른다.


1부(삼체문제)는 초반부가 지루하게 느껴져서 3부작 중 가장 얇았음에도 끝까지 읽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중간에 잊을 만하면 나오는 VR 게임 장면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왜 책에 들어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책 후반부에서 이러한 설정을 제대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고 나서야 이 책의 세계관에 처음으로 감탄할 수 있었다. 인류 문명이 삼체 세계와 조우하게 된 계기가 문화 대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중국적인 색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이기도 했다.


아마 『삼체』 3부작을 완독 한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할 것 같은데 나는 2부(암흑의 숲)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삼체인들의 방해로 인류의 기초과학 발달이 정지되고 약 400년 후 삼체인의 지구 침략이 예정된 상황에서 인류 사회가 삐걱거리면서도 변화하고 대응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면벽자 뤄지가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면서 인류가 멸망위기에서 벗어나고 삼체인과 불안한 공존을 이어가는 마지막 장면의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3부에서는 다른 독자들 사이에서 민폐 캐릭터로 엄청나게 욕을 먹고 있다는 청신이라는 미모의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인류의 운명이 계속해서 그녀의 손에 좌우되는 상황에서 청신은 꿋꿋이 인간적인 선택을 하지만, 결국 태양계 전체를 소멸의 길로 몰고 가는 동시에 본인은 다른 파트너 한 명과 함께 유일하게 생존한 인간이 된다. 여기까지만 듣고 보면 욕먹어도 싸다 싶겠지만 사실 지극히 평균적인 인간인 나도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어쩔 줄 몰라하다가 결국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물론 나도 토머스 웨이드나 뤄지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한없이 냉철한 인간들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이들처럼 비범한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인류의 운명이 맡겨질 수 있을 확률은 현실적으로 0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이미 여러 번 잘못된 선택을 했고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청신의 입장에서 최후의 인류가 되어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과연 축복이었을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툭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자업자득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청신이야말로 너무나도 인간적인 주인공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대하우주소설답게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장면들이 많다. 넷플릭스 시리즈에서도 묘사되었지만 1부의 백미는 '심판일' 호가 파나마 운하에서 해체되는 장면이었다. 2부에서는 삼체인들이 보낸 관측선인 물방울이 지구 함대를 초토화시키는 장면과 뤄지 이외의 면벽자들이 생각한 인류 구출 시나리오가, 3부에서는 물리학의 법칙을 이용하여 공간 자체를 낮은 차원으로 접어 버리는 공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는 3분의 2 정도 봤는데 다음 시즌이 나온다면 이런 장면들이 영상에서 구현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물리학의 내용이 곳곳에 튀어나오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상과학소설은 과학 내용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한 공상과학적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중요한 장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삼체』는 너무나도 훌륭한 소설이고, 정말 길지만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제목 이미지 출처: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384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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