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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swell Nov 08. 2021

초보 책임자의 고뇌 - 업무 부탁하기

유학을 나가기 전 6년 반 동안 나는 나름대로 기구한 회사 생활을 했다. 한 달 정도를 제외하고 거의 내내 팀에서 막내였던 것이다.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막내 직원에게는 빠릿빠릿함이 요구되기 때문에 늘 일정 수준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고 주변에 선배들만 있다 보니 계속 내가 젊다고 착각하게 되는 등의 고충이 있었다. 책임자로 승진한 후에는 후배가 있었지만 팀에 인원이 많지 않아 사실상 동등한 입장에서 일했다. 승진 6개월 후 유학을 나가 대학원생이 되면서 다시 피라미드의 밑바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6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회사에 복직하니 연차로는 7년 차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실제 후배들과 같이 일해본 경험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말이다. 몸이 기억을 한다는 표현을 증명이라도 하듯 회사 돌아가는 상황은 복직 후 한두 달 만에 금방 익숙해졌는데, 초보 책임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현재도 그 역할을 끊임없이 고민 중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후배들에게 업무를 부탁하는 것이다. 물론 '업무 부탁'이라고 쓰고 '업무 지시'라고 읽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와 후배들 모두 동등한 팀원의 입장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부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일부 동기들은 '지금은 경험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익숙해지면 후배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난 엑셀이 필요한 업무는 대부분 아웃소싱(?)을 하기 때문에 엑셀을 써본 지 좀 되었다' 등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난 아직 후배들에게 업무 부탁을 하는 방법을 서서히 터득하는 중인데 내가 직접 업무를 처리할 때보다 더 생각이 많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일단 부탁을 하기 전에 어떤 일을 해 달라고 요청할지를 깊게 고민하게 된다. 보통 업무가 떨어지면 대략적인 주제만 주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업무 담당자인 나와 후배들이 채워가야 한다. 그런데 사실 나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 단계가 가장 어렵다. 하급 직원 시절 저 드넓은 바다에 있는 플랑크톤까지 모두 잡아들여 보라는 식의 업무 지시를 받았던 경험이 많은데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당시 책임자들도 지금의 나처럼 방향을 잘 못 잡았던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업무 지시 방식이 정당화될 수는 없기 때문에 최대한 고민한 후 납기일까지의 시간, 난이도 등을 고려하여 명확하게 업무 부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다면 직접 얼굴을 보면서 업무를 부탁하는 것이 물론 가장 효율적이다. 요즘은 재택근무가 많기 때문에 대신 전화 통화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통화는 효과가 덜한 경우가 많다. PC 화면을 보면서 직접 이야기를 해 줘야 할 때도 있는데 그게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택근무 중에는 정리된 메일을 통해 업무 부탁을 하는 것을 선호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만 메일을 쓰는 과정에서 한 번 더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고, 부탁 내용이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그냥 내가 말로 부탁하는 것보다는 후배들이 업무를 수행할 때 조금이나마 더 편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력을 나름대로 한다고는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세하고 분명한 업무 요청은 후배들의 업무에 대한 재량을 침해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중구난방 식의 업무 부탁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내가 고민해 가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은데 훈련 측면에서는 이게 과연 맞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저것 다 해 보라는 식의 업무 부탁이 낫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아마 정답은 업무 부탁을 할 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되 후배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라는 것일 텐데, 초보 책임자인 내 입장에서는 '그게 말처럼 쉽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계속 고민해 보고 경험도 쌓이면 어느 정도 길이 보이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초보 책임자는 열심히 후배들에게 메일을 쓴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crowdpic.net/photos/%EC%B4%88%EB%B3%B4%EC%9A%B4%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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