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을 읽고
이 소설이 고유정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은 책을 살 때 알게 되었다. 정유정의 소설이니 당연히 재미있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제목은 왜 '완전한 행복'인지 궁금했었다. 그런 달달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물론 책의 저자가 정유정임을 감안하면 이 느낌은 약간의 호기심을 동반한 불길함으로 바뀐다. 내가 읽었던 정유정의 전작인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에서는 항상 절대 악에 가까운 인물이 등장하여 소설 속 세계를 휘저어 놓았기에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라는 불안이 자연스럽게 들게 된다. (참고로, 나는 최근에 발표된 정유정의 소설 중 '진이, 지니'만 아직 읽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소설에는 절대적인 악인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행복은 인생에서 불행에 이를 수 있는 요소를 하나씩 제거해가는 뺄셈이라고 주장하는 신유나라는 여자다. 행복은 뺄셈이라는 말에서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이 느껴진다. 소설에는 총 9개 장이 있는데 신유나의 딸인 유치원생 지유, 현 남편인 차은호, 언니인 신재인의 관점에서 번갈아가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주인공인 신유나는 이들 인물의 관찰을 통해서만 그려질 뿐 직접 그녀의 생각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신유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있자니 정유정의 전작을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숨 막히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고유정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이코패스 투성이었던 전작의 주인공들보다 극단적 나르시시스트인 신유나 같은 사람을 주변에서 더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나는 평소 스릴러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과도한 감정 이입은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작중 인물들에게 얼른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저 여자한테서 도망치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음은 작가의 말의 일부분이다.
언제부턴가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덕이다. 다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고유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와 함께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 마땅하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순간, 개인은 고유한 인간이 아닌 위험한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하고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신유나라는 인물을 창조해 낸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솔직히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나'였다. 워낙 신유나가 벌인 사건들이 엄청나다 보니 왜 신유나가 이런 짓을 저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부분, 즉 작가가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부분이 묻히는 듯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극단으로 가지 않고 중도를 지키는 밋밋한 이야기였으면 과연 소설이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소설의 모티브는 행복에 대한 강박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리고 소설의 제목이 '완전한 행복'이지만, 이 책이 행복과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지는 못했다. 이 책은 최소한 나에게는 행복에 관한 책은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정유정이 전작에서부터 계속해서 보여주었던,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다른 측면에서 발현된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 정유정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제목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다는 내 멋대로의 교훈도 하나 얻게 되었다.
500쪽이 넘는 소설이지만 너무나도 재미있게 빠져들어서 읽었던 소설이었다. 아이 재우고 나서 딴 짓은 일절 하지 않고 3~4일 동안 이 책만 읽었을 정도였다. 다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심약하신 분들에게는 추천하기 어렵고 밤에 읽는 것도 되도록 자제하기를 권한다. 이 책을 주로 자기 전에 읽었더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잠들기가 힘들었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1654204&memberNo=1734867